야구선수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다. 공을 잘 봐야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는 타자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만 19세 이상 성인의 50% 이상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야구선수들만 ‘시력 저하’의 마수를 피해갈 수는 없다.
물론 안경은 일반인들도 일상적으로 착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 운동선수라면 더하다. 여름에 땀을 흘릴 때마다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만에 하나 공에 맞기라도 하면 큰 부상의 위험이 있다. 시력 낮은 선수 대부분이 “경기 도중 위험하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안경보다는 콘택트렌즈 착용이나 라식수술을 택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여전히 안경을 선호하는 선수들이 존재한다. “안경으로 인한 효과가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남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왜 안경을 자신의 ‘무기’로 선택했을까. 그리고 안경은 이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을까.
# 이성열과 박용택의 ‘안경 사랑’
이성열이 처음 안경을 쓰고 등장한 것은 올 시즌 초반이다. 시범경기에서 종아리에 사구를 맞아 근육이 부분 파열됐던 그는 개막 2주가 지난 4월 8일에야 1군에 합류했다. 그런데 그동안 못 보던 안경을 착용한 채 시즌 첫 타석에 섰고, 복귀 첫 경기에서 홈런 포함 3안타를 때려내고 5타점을 올려 화제가 됐다. 심지어 반짝 활약도 아니었다. 꾸준히 잘 치고, 팀 승리에 보탬이 되는 중요한 한 방을 날렸다.
그는 맹타의 비결로 “안경을 쓴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꼽았다. “안경을 안 썼을 때도 공이 안 보인 건 아니지만, 난시도 있고 시력도 떨어진 상태였다”며 “부상 후 재활을 하다 눈이 피곤하다고 느껴져 안경을 써 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안경을 쓰고 역전 투런 홈런을 친 한화 이성열. 연합뉴스
날아오는 공이 실물보다 작아 보이는 근시와 달리, 난시는 공이 여러 겹으로 보여 타자에게 혼란을 준다. 구속이 빠를수록 휘는 정도를 가늠하기도 어려워진다. 이성열은 “아무래도 경기 중엔 불편할 것 같아 일주일 정도 고민을 하다가 쓰기로 결정했는데, 오히려 타석에서 더 편하고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때 그가 조언을 구한 선배가 바로 박용택이다. “박용택 선배의 추천을 받아 같은 가게에서 안경을 맞췄다”고 귀띔했다.
최적의 조언자였다. 박용택은 이미 2011년부터 안경을 써온 베테랑이다. 야구에 가장 도움이 되는 형태와 렌즈를 찾아 끊임없이 여러 개의 안경을 실험하고 검토했다. 집에 소장한 안경만 수십 개에 달한다. 야구를 향한 장인정신이 ‘안경’에도 투영됐다.
사실 박용택은 LG 입단 전 이미 라식수술로 시력 교정을 했다. 하지만 2011년 여름 무렵 타격을 하다 자꾸 공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올스타 브레이크 때 검진을 받은 결과 양쪽 시력이 각각 0.9라는 진단이 나왔다. 수술 이후 10년 넘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시력이 떨어진 것이다.
물론 0.9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의 시력이다. 하지만 야간경기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조금이라도 더 공을 잘 보는 게 중요하다. 동체시력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베테랑 타자들에게는 더 그렇다. 박용택 이전까지 역대 최다안타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양준혁 MBC SPORTS+ 해설위원은 은퇴 직전까지 양쪽 시력 2.0을 유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정도 시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교정시력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박용택은 그런 이유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에 대한 투자였다. 그리고 다시 좋은 페이스를 찾았다. 드물게 30대 이후 더 좋은 타격을 하기 시작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 ‘안경’으로 이름 날린 많은 선수들
투수들은 주로 포수 미트를 더 또렷하게 보기 위해 안경을 쓴다. 안경 쓴 투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수는 단연 롯데의 레전드인 고(故) 최동원이다. 그는 투구 전 송진가루→신발끈→양말→모자챙을 차례로 만진 뒤 공을 던지는 루틴으로 유명했다. 눈을 찡긋하며 금테 안경을 고쳐 쓴 뒤 투구 폼을 가다듬던 최동원의 모습은 여전히 많은 야구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전무후무한 4승을 올리며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던 1984년 당시 부산 지역 남성들 사이에 금테 안경이 유행했다는 후문도 있다.
최동원은 경남중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다고 한다. 생전 그는 “당시 시력은 0.7이었는데, 사물을 더 확실하게 보기 위해 안경을 쓰게 됐다”고 했다. 그 후로 2011년 9월 눈을 감기까지 안경과 분신처럼 함께했다. 사직구장에 세워진 최동원 추모 동상에도 그의 상징이었던 안경의 흔적이 선명하다.
연합뉴스
염종석은 그런 최동원의 뒤를 이어 롯데에 나타난 ‘안경 에이스’였다. 1992년 고졸 신인으로 프로에 데뷔한 뒤 단숨에 팀의 1선발로 활약하면서 롯데가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데 일조했다. 그 후 2000년대 들어 롯데가 긴 암흑기에 빠지자 “다시 팀이 살아나려면 안경을 쓴 오른손 에이스가 필요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롯데 팬들에게 희망을 안긴 선수가 바로 박세웅이다. ‘안경 에이스’ 계보를 이어 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성장하고 있다. 올 시즌엔 부상으로 인해 아직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지난해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면서 롯데의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았다.
박세웅은 야구를 시작하기 전인 대구 경운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다. 당시 시력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난시가 생겨 안경을 쓰게 됐다는 후문이다. 경기 때는 스포츠 고글 타입의 안경을 끼고 마운드에 오른다. 날렵한 테두리의 고글이 박세웅의 순해 보이는 인상을 보완해주는 효과도 있다. 라식 수술을 받을 만도 하지만, 그는 “특별히 안경 때문에 불편한 점이 없어 괜찮다”고 했다.
양상문도 선수 시절 ‘안경 쓴 좌완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다. 부산고 재학 당시 3대 전국대회에서 전승을 올리면서 고교 야구 역사에서 ‘부산고의 해’로 불리는 1977년의 승승장구를 이끌었다. 고려대에 진학한 뒤에도 대학야구연맹전 우승을 뒷받침하면서 고려대 에이스로 입지를 굳혔다. 연세대와의 첫 정기전에서 같은 부산 지역 경남고 출신인 최동원과 ‘안경 라이벌’ 대결을 펼쳐 완투승을 올린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를 기억하는 야구인들은 “양상문은 안경 때문에 스마트한 투수라는 느낌을 줬다. ‘교수님’ 같은 모습으로 강속구를 던졌다”고 기억했다.
LG 정삼흠과 OB(두산의 전신) 김상진 역시 안경을 쓰고 1990년대를 풍미한 잠실의 레전드였다. 1989년 태평양에서 혜성처럼 데뷔했던 잠수함 투수 박정현도 안경을 낀 채 팔이 빠져라 공을 던지며 마운드에서 투혼을 발휘했다.
타자들은 투수들보다 시력 교정수술을 더 조심스러워 한다. 과거 삼성에서 은퇴한 심정수처럼 라식 수술 이후 야간 경기에서 빛이 번져 보이는 부작용을 겪은 선수들도 있어서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브라이언 매캔은 라식 수술만 두 차례 받은 뒤 결국 다시 안경을 썼을 정도다. 한 베테랑 감독은 “투수는 라식 수술을 적극 권장할 만하지만, 타자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콘택트렌즈가 편하기는 하지만, 안구건조증이 있는 선수에게는 더 큰 괴로움을 안긴다. 이 때문에 ‘안경 쓴 타자’들은 투수들보다 훨씬 더 자주 보인다. 한대화는 현역 시절 내내 안경을 착용하고 ‘우승 청부사’로 활약한 대표적인 안경 타자다. ‘스나이퍼’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장성호도 2011시즌을 마치고 라식 수술을 받기 전까지 안경을 쓰고 타격하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조성환은 눈가에 맞은 사구 후유증으로 공이 흐리게 보이는 증상에 시달리다 2011년 안경을 착용한 뒤 효과를 톡톡히 봤다.
# 안경 소재도 신경 써야
꼭 눈이 나쁜 선수만 안경을 쓰는 건 아니다. 안경을 ‘한 몸’처럼 여기는 KIA 에이스 양현종은 야구를 하기 전인 광주 학강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다. 당시 시력이 0점대 초반으로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13년 라식 수술을 받아 지금은 양쪽 시력이 1.5로 일반인들보다 좋다. 그래도 여전히 경기에 나설 때 렌즈에 도수가 없는 고정형 스포츠 고글을 쓴다. 오랜 습관이 몸에 배어서다.
KIA 김세현도 양쪽 시력이 모두 1.5로 최상급이지만, 가끔씩 눈앞이 흔들리는 증상이 생겨 2년 전부터 안경을 종종 써왔다. 아무래도 경기 도중 고글 안에 습기가 차는 현상이 생겨 매번 착용하지는 않지만, 당일의 눈 컨디션에 따라 안경을 쓰기도 한다. 군복무를 하고 있는 넥센 박주현은 오른쪽 시력이 1.0, 왼쪽 시력은 0.3로 크게 차이가 나는 특이한 사례다. 왼쪽 눈에만 콘택트렌즈를 끼는 시도를 해봤지만, 스스로 이물감을 많이 느껴 포기했다. 그렇다고 맨 눈으로 던지기엔 포수의 사인이 자꾸 흐릿하게 보이는 게 문제였다. 결국 안경을 맞춘 뒤에야 성적도 안정을 찾았다.
안경을 맞출 때는 소재와 크기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노련한 감독의 지략에 희생당할 수도 있다. 2008년 5월 28일 LG와 두산의 잠실 라이벌전 도중 두산 투수 이재우가 그랬다. 당시 LG 사령탑이던 김재박 감독은 심판을 향해 “이재우의 안경테가 너무 두껍고 빛을 반사해 타자의 타격에 지장을 준다”고 항의했다. 시력이 나쁜 이재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사히 투구를 마쳤다. 하지만 다음 이닝에 다시 이재우가 안경을 쓰고 올라오자 김재박 감독이 재차 거세게 문제를 삼았다.
이때는 두산 사령탑이던 김경문 감독도 벤치를 박차고 나와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쓴 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재우는 주심의 지시에 따라 안경을 벗고 공을 던져야 했고, 2루타와 희생 플라이를 연이어 맞고 실점한 뒤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양현종은 벗고 김광현은 쓰고’ 동갑내기 에이스 안경 에피소드 1988년생 동갑내기 좌완 에이스인 양현종(KIA)와 김광현(SK)은 나란히 ‘안경’에 얽힌 에피소드가 하나씩 있다. 양현종은 늘 쓰던 안경을 벗어서 화제가 됐고, 김광현은 안 쓰던 안경을 갑자기 착용해서 눈길을 모았다. 양현종은 지난 3월 14일 두산과의 광주 시범경기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안경을 벗고 마운드에 올랐다. 2017시즌을 앞둔 스프링캠프 도중 한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팀 우승, 팀 좌완 최다승(93승) 달성, 둘째 순산까지 세 가지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안경을 벗고 경기에 나서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2017년 한 해 동안 양현종의 세 가지 바람이 모두 이뤄졌다. 결국 공개적으로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사진 제공 = KIA 타이거즈 투수는 작은 변화 하나에도 매우 민감한 직업이다. 늘 얼굴 위에 걸쳐져 있던 안경이 갑자기 없어지면 투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양현종은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정규시즌이 아닌 시범경기에서 ‘안경 벗기 공약’을 지키기로 했다. 다행히 ‘안경 없는’ 양현종도 안경 쓴 양현종 못지않게 강한 투수였다. 최고 시속 144㎞의 공을 던지며 3이닝 무실점으로 구위 점검을 마쳤다. 그래도 역시 어색한 기분은 피할 수 없다. 그는 경기 후 “안경을 벗고 던지니 마치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어색하고 긴장돼 경기에 집중이 잘 안 됐다”며 “앞으로 다시는 안경을 벗지 않겠다”고 웃어 보였다. 아마도 그 경기가 안경 벗은 투수 양현종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듯하다. 반대로 김광현은 2013년 5월 7일 두산과의 인천 홈경기에서 검정색 뿔테 안경을 쓰고 마운드에 올랐다. 2007년 프로에 데뷔한 이후 그가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등판한 경기였다. 갑작스러운 안경의 등장에 관심이 쏟아졌다. 이때도 사연이 있었다. 왼쪽 어깨가 좋지 않았던 김광현은 2군에서 재활을 마친 뒤 4월 18일 포항 삼성전부터 1군에 복귀했다. 그날 최고 시속 150㎞의 강속구를 뿌리면서 승리 투수가 됐지만, 변화구 사인에 직구를 던지는 등 몇 차례 사인 미스를 범했다. 경기 후 “낮경기만 하다 시즌 처음으로 야간 경기를 치르니 사인이 잘 안 보였다”며 “평소 난시도 있어서 시력검사를 다시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다음 등판에서도 같은 증상으로 어려움을 겪은 김광현은 결국 고육지책을 택했다. 포수 사인을 잘 보기 위해 안경을 썼다. 마치 해리 포터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영화 ‘메이저리그’의 안경 쓴 주인공 ‘와일드 씽’처럼 강속구를 던졌다. 제구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 그러나 역시 안 쓰던 안경을 착용하고 공을 던지는 게 불편했던 듯하다. 두 경기 만에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광현과 안경의 짧은 인연도 수많은 포토뉴스만을 남긴 채 그렇게 끝났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