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중무장을 하고 판도라로 날아간 것은 바로 특정한 자원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아름다운 별에서 그 자원을 어떻게 채굴할 것인가 외에는 관심이 없다. 자원에 대한 집착이 아름다운 별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집착이야말로 고통이 일어나는 이유 중의 이유라고 한 이는 붓다였다. 자원에 대한 집착이 나비족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원채굴을 방해하는 적(敵)으로 간주한다. 어디 영화 안에서뿐이랴. 사랑에 대한 집착이 사랑이 끝난 상대를 놔주지 않고,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분노하거나 사랑해달라고 구걸하게 만드는 것을 많이 보지 않았는가. 그뿐인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젊음에 대한 집착이 주름살을 혐오하게 만들고, 편하게 나이 들지 못하게 한다. 사회적 자아에 대한 집착이 자의식 과잉에 시달리거나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집착은 고통의 이면이다. 고통은 집착으로 인해 생명의 에너지가 완고해지고 딱딱해져서 생기는 것이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내려놓으라”고 하고 “집착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충고일 때는 최악이다. “내려놓으라” 해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거라면 왜 ‘아름다운 죄’라며 울먹이겠는가? “버리라”는 설교에 쉽게 버릴 수 있는 거라면 붓다까지 뭐 그렇게 오랜 명상이 필요했겠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빼앗기기 전에는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중생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못하고 쩔쩔매보신 적이 없나? 미워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인격’(?)으로 꾹꾹 눌러놓은 증오심이 갑자기 엉뚱한 데서 폭발해서 스스로도 놀란 경험은 없나?
도대체 “놓아버려야지, 놓아버려야지” 하는 강박증으로도 놓아버릴 수 없었던 집착의 끈은 언제 소멸할까? 바로 관조(觀照)할 때, 바라볼 때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판단하고 계산하고 두려워하고 아파하고 짜증내고 안타까워하고 놀라고 설레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마치 아이를 바라보듯이, 자화상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가 자신의 얼굴과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사랑할 때 심장이 반응하는 것을 바라보면 그 심장이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는 사랑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미워할 때 명치끝에 걸린 분노를 바라보면 분노가 길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바라봄’이 제대로 되어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할 수 있다. 뭐든 사로잡히는 것이 문제이지 흐르는 것은 건강한 것이다. ‘바라봄’이 제대로 되어야 시기와 질투, 불안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까지 제대로 돌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바라봄’이야말로 최상의 기도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