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이 쓰인 뒤로는 설은 사회적 기능을 거의 다 잃었다. 설이 지금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가족이 한데 모이도록 한다는 것일 터이다. 현대인들이 점점 시간에 쪼들리므로, 경조사를 빼놓으면, 명절에나 온 가족이 한데 모일 수 있다.
그나마 해가 갈수록 명절의 즐거움이 옅어진다. 사회 환경이 바뀐다는 점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 형제들 사이의 우애가 줄어든다는 점이 훨씬 근본적인 요인일 것이다. 어릴 적엔 형제들이 한데 모이면, 그렇게도 즐거웠다. 나이가 들자, 차츰 형제들 사이가 소원해지더니, 모두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자, 정이 제 자식들에게로만 쏠리게 되었다. 그런 사정이 명절에서 즐거움을 많이 앗아간다.
나이가 들면 우애가 줄어드는 사정을 진화생물학자들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들을 널리 퍼뜨리려 애쓴다. 부모가 자식을 끔찍이 여기는 것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들을 퍼뜨리려는 본능에서 나왔다. 결혼할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자신의 유전자들을 퍼뜨릴 길이 없다. 그때엔 동생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최선이다. 동생들은 자신과 대략 유전자들의 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옛말은 이런 사정을 가리킨다. 당연히, 출생 순서는 사람의 성격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다. 미국 심리학자 프랭크 설로웨이는 장남들이 동생들과 닮기보다는 서로 닮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장남들은 지차(맏이 이외의 자식)들보다 마음이 훨씬 굳세다고 한다.
형제들이 어른이 되어 자기 자식들을 낳으면, 동생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유전적 관점에선 비합리적이다. 그런 행태는 자기 자식보다 조카들을 위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우애는 식고 자기 자식들만 끔찍이 챙기게 된다. 우애가 깊다는 얘기를 듣던 재벌 가문의 형제들이 나이가 지긋해지면 재산을 놓고 다투게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젊을 때 동생들을 잘 돌보아준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서운한 마음이 들게 된다. 제 자식들 보살피기 바쁜 동생들이 어릴 적에 형이 돌보아준 일을 제대로 기억할 리 없다. 부모 제사엔 관심이 없으면서 유산 배분에선 눈에 불을 켠다.
그러나 그런 서운함은 가볍게 넘길 일이다. 옛적에 동생들을 돌보아준 일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든 성취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동생들을 돌보아주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격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장남들의 굳은 마음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설은 지나간 세월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베푼 형들은 은은한 자부심을, 그리고 도움을 받은 동생들은 따스한 고마움을 되살려 우애를 화로의 불씨처럼 다독거릴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과 가르침과 재산을 소중히 새길 시간이다. 엘리어트가 <가족의 재회>에서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그리고 일어나는 것마다 과거에 시작되었고, 미래를 세게 밀어붙인다(And whatever happens began in the past, and presses hard on the future).”
복거일 소설가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