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경기 성적이나 좋았으면 고생한 보람이나 있었겠지만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0 대 9로 패했고 터키와의 경기에선 0 대 7로 패하고 말았다. 본선 무대에 오른 16개 팀 중 16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귀국했다. 굳이 명분을 찾자면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을 1승1무로 이겨 세계의 강호 축구팀이 자웅을 겨루는 월드컵 본선무대에서 뛰었다는 정도였다. 또 나라 살림 탓 타령이지만 당시의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에 원조를 얼마나 해 주느냐에 따라 나라살림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형편이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2002년, 대한민국은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세계의 강호들을 물리치고 4강 신화를 이룩했다.
새삼 축구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오는 6월에 있을 월드컵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대한민국의 스포츠 수준이 아시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강국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벅찬 감격에서이다. 멀리 밴쿠버에서 들려온 잇단 승전보는 우리 스포츠가 이제는 아시아의 울타리 안을 맴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본의 어느 신문은 한국에 스포츠를 가르치던 일본이 이제는 한국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고 썼다. 스포츠에 관한 한 우리는 더 이상 개발도상국도 아니며 외국의 스포츠 스타를 우러러보기만 하던 후진국도 아니다. 이미 세계적 스타가 된 김연아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프로 축구팀에서 뛰는 박지성, 뉴욕 양키스 야구팀에 합류한 박찬호, 수영의 박태환 등등, 우리는 이제 세계적 스타를 우러러보던 시대에서 세계적인 스타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한 주 내내 신문·방송을 장식한 빅뉴스는 밴쿠버에서 날아온 승전보와 세종시를 둘러싼 정치권의 줄다리기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스포츠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했지만 정치는 아직도 반세기 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여야 간 또는 여당 파벌 간의 드잡이를 보면서 법규나 제도는 선진화되었을지 몰라도 정치인들의 행태는 반세기 전에 머물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여전한 단상점거나 날치기는 반세기 전의 24파동이나 3선 개헌 파동과 무엇이 다른가. 친이(親李)니 친박(親朴)이니 하는 집안싸움은 계파 싸움을 벌이다 끝내 갈라섰던 1960년 민주당 신·구파 싸움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지난주의 밴쿠버와 세종시의 뉴스에서 우리 시대의 극명한 명암(明暗)이 빚어내는 밝은 빛과 깊은 그늘을 보았다.
이광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