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은 6·13 지방선거에서 최악의 성적표를 거뒀다. 하지만 반성하기에 앞서 계파 싸움을 이어가며 ‘네탓 공방’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있다. / 박은숙 기자 = 자유한국당 김성태 당 대표 권한대행이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하고자 회의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2018. 6.21.
‘친박(친박근혜)계의 좌장’으로 불리는 서청원 의원이 지난 20일 한 말이다. 현역 기준 최다선 국회의원답게 정치적 통찰력이 있는 그가 한국당의 현 문제점을 시원하게 꼬집고 반성했다. 그리고 서 의원은 이날 30년 넘게 몸담은 한국당 탈당을 선언했다.
최근 한국당에 돌고 있는 낯뜨거운 책임공방의 시작은 홍준표 전 대표가 사임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이른바 ‘살생부’였다. 홍 전 대표는 ‘9가지 유형의 청산 대상’이라며 △고관대작 지내고 국회의원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추한 사생활로 더 이상 정계에 둘 수 없는 사람 △의총에 술 취해 들어와서 술주정 부리는 사람 등 총 9가지의 예시를 들었다. 이때부터였다. 홍 전 대표가 지방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이와는 별개로 당 대표가 자당의 동료 의원들을 비방해도 되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내용의 사실관계보다는 그의 행동에 많은 지적이 나왔다. 일종의 내부총질과 다름 없었다.
이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당을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은 두 번째 살생부가 등장했다. 바로 친박계 의원 청산의 내용을 담은 ‘박성중 메모’다. 사건의 발단은 19일 사진기자에게 포착된 박성중 의원의 스마트폰에 담긴 자필 메모 사진이었다. 이는 바른정당에서 한국당으로 복당한 복당파 의원들 다수와 김성태 원내대표 겸 당 대표 권한대행이 참여한 조찬모임에서 나온 발언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로 ‘친박 핵심 모인다→서청원, 이완구, 김진태 등’ ‘(우리도) 세력화가 필요하다→적으로 본다, 목을 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마치 비박세력이 친박세력을 견제하는 듯한 내용의 메모가 공개되며 내홍은 더 깊어져만 갔다.
친박-비박 계파 갈등이 폭발한 것은 21일 의원총회였다. 당의 쇄신과 재건에 대한 논의를 위해 소집된 이 의총은 오전부터 시작돼 오후 5시 30분이나 돼서야 마무리가 됐다. 점심식사는 김밥과 샌드위치로 해결할 만큼 분주하게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할애하며 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혁신안에 대한 결론 하나 내지 못하고 계파 간 이견만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총에서 친박계와 비박계는 공방에만 몰두했다. 메모에 ‘친박’이라고 이름이 실린 김진태 의원은 “계파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반발했고 이장우 의원도 “있지도 않은 사실로 당내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에 대해 (박성중 의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의원들은 박 의원에 대해 당 윤리위원회의 조사와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마찰이 거세지더니 비박계인 김성태 권한대행에게 사퇴를, 김무성 의원에게 탈당을 종용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김진태 의원은 의총이 끝난 직후 페이스북 글을 올려 “박성중 의원의 메모로 당권을 잡아 상대편을 쳐낼 생각만 하는 속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모임에 김성태 권한대행도 참석했으니 책임져야 한다”고 비박계를 싸잡아 비판했다.
박은숙 기자 = 당 위기수습 및 쇄신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초선의원 회동에서 한 의원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메모를 하고 있다. 2018.6.19
문제는 친박-비박 계파싸움뿐만이 아니었다. 초·재선과 중진 의원들 간의 문제도 불거졌다. 지난 15일, 성일종·김순례·이은권·정종섭·김성태(비례) 의원 등 초선의원 5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10년 보수정치의 실패에 책임이 있는 중진들은 정계은퇴하라”며 인적쇄신을 요구했다. 이어 초선인 윤상직 의원은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먼저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김무성(6선)·김정훈(4선) 등 중진 의원들은 불출마를 선언하며 2선 후퇴하기도 했다.
이번 마찰은 잔류파와 복당파의 기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17년 1월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어수선하던 때에 비박 의원들이 새누리당(현 한국당)을 떠나 바른정당을 창당했으나,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의 대선 패배 후 대부분의 의원들이 다시 한국당으로 복당했다. 이들은 친박계로 분류되던 잔류파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여왔다. 이처럼 한국당은 친박계와 비박계, 초·재선과 중진, 잔류파와 복당파, 여러 갈래로 분화돼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비박계로 분류되는 중진 강석호 의원(4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친박과 비박에 대한 부분을 이념적으로 청산하지 않았고, 복당파가 한국당으로 들어온 뒤 당시 치열한 논쟁들을 정리하지 못했었다”라며 “탄핵에 찬성, 반대, 출당, 복당했으면 서로의 잘잘못에 대해 정리를 하고 화합을 했어야 했는데 이를 묻어놓은 채 대선과 지선에서 패하니 결국 이렇게 계파싸움으로 번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친박계 의원들이 복당파이자 비박계인 김성태 권한대행을 향해 퇴진을 요구하는 것을 두고 “의원들은 김성태 대행이 독선적으로 나서서 언론에 먼저 공개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에 날을 세운 것”이라며 “(하지만) 지방선거에서의 패배를 김성태 대행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건 좀 과한 측면이 있다”고 감쌌다.
이어 강 의원은 ‘초재선들이 중진에게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는 것’과 관련해 “틀린 말은 아닌데 초선 중에 중진 못지 않은 초선이 껴 있다. 정종섭 의원 등이 껴서 중진을 향해 요구를 하니 초선의 선명성이 덜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의 혼란을 ‘계파 싸움’이라고 분석한 강 의원과는 다르게 친박계로 알려진 한선교 의원은 친박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한 의원은 계파에 대해 “계파란 보스가 영향력이 있을 때나 모이는 거지 지금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데 무슨 계파냐”며 반문했다.
한 의원은 이어 “실체도 없는 친박을 가상의 적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하고, 결속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 정치인들도 북한은 물론 존재하지만, 침략하지도 않는 북한을 대상으로 정치를 펼치지 않았나. 그건 자기들이 공고히 뭉치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만든 것과 다름없다”며 “친박은 언론에만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한 의원은 “김성태 대행이 중앙당을 해체한다는 것은 비주류였던 세력들이 주류가 되기 위해 궁리하는 것”이라며 “(찌라시 등의 살생부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쓴 것 갖고 (유난을 떤다). 지금이 선거 앞둔 공천 때도 아닌데 무슨”이라고 말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