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차기 회장 후보가 결정되긴 했지만 포스코 안팎에서는 잡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권오준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이후 지난 2개월간 불투명한 선출 과정에서 비롯된 정치권 개입 의혹이 또 다시 반복되면서 논란이 가중된 탓이다. 회장 선출을 백지화하고 처음부터 후보 선정과 외부 검증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을 정도다. 갈등의 원인인 ‘포스코 최고경영자(CEO) 승계카운슬’(카운슬)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된 상태며 일부에서는 민·형사상 고소·고발 등 법적 구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앞 직원들이 출근하고 있다. 고성준 기자
포스코는 지난 4월 사외이사들로 이뤄진 카운슬을 구성하고 내부적으로 차기 회장 선출 작업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공정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0.5% 이상 지분을 가진 30여 개 주주사에서 외부 출신 CEO 후보를 추천받았다. 최초 20여 명의 후보 가운데 6차례 회의를 거쳐 11명(외국인 1명 포함)의 후보가 추려졌고, 자체 육성시스템을 통해 선정된 내부 후보를 포함, 5명의 면접 후보군이 압축됐다. 카운슬에서 추천받은 후보를 대상으로 CEO후보추천위원회는 심층면접을 거쳐 차기 회장으로 추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CEO후보추천위원회는 장인화 사장과 최정우 사장을 대상으로 지난 22일 오후부터 23일 오후까지 세 번에 걸친 면접 끝에 최 사장을 선택했다.
지난 22일 포스코는 신임 회장 후보로 김영상 포스코대우 사장, 김진일 전 포스코 사장, 오인환 포스코 사장, 장인화 포스코 사장, 최정우 포스코켐텍 사장 등 5명을 발표했다. 앞서 유력 후보로 거론된 김준식 전 포스코 사장, 박기홍 포스코에너지 사장, 이영훈 포스코건설 사장, 황은연 전 포스코 사장 등은 제외됐다. 구자영 전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등 외부 출신 후보도 일괄 배제됐다. 구 전 부회장은 포스코 근무 경력이 있지만 1990년대 초반 회사를 떠나 외부 출신으로 분류된다. 포스코 측은 이날 “당당하고 떳떳하게 소신껏 후보 선정을 위해 노력했다”는 입장을 전했다.
표면적으로 그간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한 후보는 대부분 고배를 마셨다. 포스코 파벌을 상징하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이자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시절 포스코 사장을 지낸 김준식 전 사장은 예상을 깨고 ‘5인 후보’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초·중학교 동창이자 이낙연 국무총리와 광주제일고 동문이란 점이 부각됐지만 결과는 ‘컷오프’였다.
6월 초 바른미래당이 제기한 ‘장하성 포스코 인사 개입’ 의혹은 해프닝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금융감독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얼마 전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 경질 때 장하성 실장이 최 전 원장의 면담 요청을 거부할 정도로 몸을 사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포스코 인사까지 개입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포스코 사정에 밝은 한 인사도 “현 정부가 지난 정부와 달리 포스코 인사 문제에 대한 개입을 꺼린다”며 “정치적 명분이나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어떤 면에선 안팎의 혼란이 많아 답답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권오준 전 포스코 회장. 이종현 기자
부산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박기홍 사장 역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친분이 부각됐지만 ‘컷오프’됐다. 참여정부 출신인 변 전 실장의 존재 역시 이번 인사에선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셈이 됐다. 김준식 전 사장과 함께 ‘정준양 키즈’로 불리는 박 사장은 포스코를 떠난 뒤 다시 대표 임원으로 복귀해 뒷말을 낳기도 했다. ‘반(反) 권오준 라인’으로 분류되지만 사생활 관련 투서로 곤욕을 치른 이영훈 사장, 박근혜 정부 당시 대외협력업무를 총괄한 황은연 전 사장도 중도낙마했다. 포스코 안팎에선 정치적 논란의 여지가 있는 후보를 카운슬이 사전 배제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카운슬이 추천한 5명의 후보 중에는 외부 출신이 단 1명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임자인 권오준 회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인사가 대거 후보군에 포함되면서 이른바 포피아(포스코+마피아) 논란이 증폭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권오준 라인’으로 분류되면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던 장인화 사장, 오인환 사장은 선택받지 못했다.
지난 20일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각각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포스코 승계카운슬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현 정부 여당과 개혁 성향의 시민단체는 “권오준 전 회장을 비롯한 포피아가 카운슬을 통해 포스코를 사유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민우 전 포스코 대외협력팀장은 “포피아가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필사적으로 카운슬에 개입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외부 출신인 구자영 전 부회장이 후보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선 이례적으로 사퇴 사실이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다. 재계 한 인사는 “양측 모두 부인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문재인 정부와 SK그룹 간 친분설이 있는 가운데 SK 출신이 되면 크든 작든 논란이 될 부분을 미리 우려한 것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 회장 인사를 둘러싼 논란은 역대 정부마다 되풀이돼 왔다. 역대 포스코 회장 중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친 회장은 단 1명도 없다. 특히 2000년 민영화된 이후에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김없이 ‘연임 후 중도퇴임’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지난 4월 사퇴한 권오준 회장도 마찬가지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지난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포스코 미래 50년을 위한 긴급 좌담회’에서 “민영화된 공기업이 정권의 전리품 정도로 인식되는가 하면 회장 취임 2년이 지나면 참호를 구축해 자기 사람을 심고, 회장에 대한 감시 기능이 미약해졌다”고 지적했다. 류 대표는 이날 포스코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강화하는 대안을 내놨지만 이마저도 국민연금의 관리·감독기구인 보건복지부가 전향적인 검토를 하지 않는다면 ‘구호’에만 그칠 수 있다. 포스코 측 역시 스스로 ‘민영기업’임을 주장하며 국민연금의 권한 강화를 내심 반대하는 분위기다.
정치권 일각에선 아예 정부가 공기업 성격을 띤 포스코 회장 선임에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앞의 포스코 사정에 밝은 인사는 “문제는 결국 투명하지 못한 선출 과정”이라며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내부 적폐를 방치한 세력에 국민기업을 넘겨줘선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포스코 수사에 참여했던 한 사정기관 인사는 “임원부터 일반 간부까지 도덕적 해이가 심해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철강업계는 “터무니없다”며 반발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이번 역시 일부 정치인이 특정 후보를 밀고, 후보 측이 투서를 통해 경쟁자를 음해하는 등 진흙탕 싸움이 계속됐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민영기업인 포스코에 정치권이 개입하는 건 옳지 않다”며 “정치권 입김으로 선임된 회장이 주변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나”라고 주장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