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필품이 부족했던 구 소련 시절, 러시아인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는 외출할 때 가방을 갖고 다니는 것과 사람이 몰려 있는 곳에선 왜 몰려 있느냐고 물어볼 것 없이 우선 줄을 서는 것이었다. 생필품을 구입하거나 버스나 전차를 탈 때 줄을 서야 차례가 온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방은 언제 어디서 필요한 물품을 사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지니고 다녀야 한다. 가는 곳마다 줄서기에 짜증이 난 어느 시민이 항의차 크렘린 궁에 갔더니 거기에도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되돌아오고 말았다는 우스개도 있었다.
그러나 질서의식과 페어플레이를 가르치는 줄서기가 요즘은 좋은 뜻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잔재주를 뜻하는 것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열(列)이나 오(伍)를 뜻하는 용도보다는 학연이니 지연, 혈연 등에 쓰이는 끈(緣)을 뜻하는 용도로 더 자주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줄을 잘 서야 출세를 한다”느니 “줄 잘못 서는 바람에 물먹었다”는 따위의 대화를 공공연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오는 6월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정후보 당선을 겨냥한 공무원들의 줄서기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더러는 본인의 충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까지 동원, 유력후보의 출판기념회나 행사장에 보내 눈도장을 찍게 한다는 것이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투표날짜가 두 달이 넘게 남았는데도 공무원이 선거운동에 개입했다가 적발된 사례가 벌써 40건이나 된다고 한다. 투표일이 가까워지고 득표전이 과열될수록 공무원의 줄서기나 불법 선거운동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선거 때마다 벌어지는 이 같은 줄서기는 어쩌면 공무원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자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기도 하다. 선거가 끝난 후에 뒤따르는 논공행상 인사, 보복성 인사가 뿌리 뽑히지 않는 한 선거 때마다 기승을 부리는 줄서기식 불법 선거운동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단체장에 당선만 되면 승진은 물론 보직을 바꾸거나 출연기관장을 임명하는 등 인사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공직자들이 선거를 앞두고 줄서기에 급급한 것도 단체장의 그 같은 인사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치단체장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선거 때마다 공직자들의 줄서기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곤 한다. 그러나 행정이 정치에 오염되고 당선기여도에 따라 감투를 나누고 의자를 높여주는 보은(報恩)적 정실인사가 남아있는 한 공무원들이 선거에 오불관언(吾不關焉), 오로지 맡은 일에만 전념하는 건전한 공직풍토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광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