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시각)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F조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가 열렸다. 16강 진출을 위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한국에서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 영동대로와 종로구 광화문 광장 등에서 거리응원전을 펼쳤다. 독일 역시 마찬가지로 축구팬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거리응원을 진행했다. 그 시간 ‘일요신문i’는 독일 베를린 적진 한복판을 직접 찾았다. 베를린 현지에서 한국 대 독일전 거리응원 풍경을 전한다.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예선 F조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위해 독일 베를린의 대표적 명소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거리응원이 펼쳐졌다. ‘일요신문i’가 직접 현장을 찾아 그날의 분위기를 전한다. 사진=민웅기 기자
#적의 심장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거리응원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열렸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입구를 본떠 1791년에 만든 개선문이다. 이곳은 베를린의 대표적인 명소로 유명하다.
한국과 독일의 경기 킥오프는 현지시간으로 오후 4시. 앞서 6월 23일 독일-스웨덴전은 이상 기온으로 춥고 비가 많이 왔다. 하지만 이날은 해도 쨍쨍하고, 온도도 따뜻했다. 거리응원을 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16강 진출을 어느 정도 확신했는지, 날씨만큼 거리응원장을 향하는 독일팬들의 표정이 밝았다.
한국과 독일전 거리응원이 펼쳐지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소지품 검사 실시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진=민웅기 기자
기자는 경기 시작 1시간 전 브란덴부르크 문에 도착했다. 한국과 달리 거리응원을 위해 마련된 공간은 바리케이트로 둘러져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많은 인파가 모이는 장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테러 등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보니 거리응원장에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소지품 검사가 실시됐다. 입구 요원들에게 가방을 열어 안에 든 물품을 모두 보여줘야 했다. 특히 깨지면 다칠 수 있는 향수 화장품 등 유리병은 마련된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입구를 통과해 관중들 사이를 비집고 거리응원 중심부로 들어갔다. 기자는 한국 대표팀 유니폼은 아니지만, 빨간 티셔츠에 태극기가 그려진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한국의 승리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에, 거리응원을 즐기자는 생각이었다. 지나가면서 만난 독일인들도 빨간옷을 입은 한국인의 등장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파이팅”을 외치며 호응하기도 했다.
경기 시작 한 시간이 남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응원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초대가수가 나와 공연을 펼치고, 사회자가 응원 구호를 유도했다.
경기 직전 무대의 사회자가 선발출전 선수 엔트리 발표했다. 여기에 코카콜라 캔이 이용됐다. 독일에서는 코카콜라 캔에 독일 대표팀 선수 한명 한명 모습이 담긴 월드컵 한정판 캔이 판매되고 있었다. 포메이션이 그려진 판넬에 선발출전 선수의 캔을 올리며 설명하는 아이디어를 보였다. 코카콜라는 피파 공식 스폰서이기도 하고, 이날 베를린 거리응원의 주최·후원사로 보였다.
경기 직전 무대의 사회자가 독일 선발출전 선수 엔트리를 코카콜라 캔의 얼굴을 이용해 발표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피파 공식 스폰서이기도 하고, 이날 베를린 거리응원의 주최·후원사로 보였다. 사진=민웅기 기자
마누엘 노이어, 마츠 훔멜스, 조슈아 킴미히, 토니 크로스, 마르코 로이스, 티모 베르너 등의 캔이 소개되며 자리를 차지했다. 관중들은 선수들의 이름을 복창하며 응원을 보였다. 하지만 한 선수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야유를 보냈다. 메수트 외질이었다.
야유에 참여한 20대 독일인 청년은 “외질은 공격 찬스를 너무 많이 잃어버린다. 플레이가 활발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외질은 이번 월드컵 1차전에서 너무나도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2차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반면, 요나스 헥터에 대해서는 반응이 후했다. 또 다른 30대 독일 남성은 “헥터는 열심히 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역할을 한다”고 평했다.
#노멀한 시작
드디어 거대한 스크린에 경기 중계화면이 연결됐다. 브란덴부르크 문에 모인 독일 관중들의 함성이 터졌다. 출전국 국가를 부르는 식전 행사에서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독일의 거리응원은 한국과 다르게 경기 중에는 단체로 구호를 외치는 응원이 따로 없었다. 각자 조용히 경기에 집중할 뿐이었다. 또한 일부 유럽이나 남미 국가 광팬들처럼 볼터치 한번, 탈압박 한번에 환호 혹은 육두문자로 즉각 반응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평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냉철하고 차분한 독일인의 모습이 축구 관람에서도 이어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전반은 예상대로 독일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진행됐다. 훔멜스, 니클라스 슐러 등 최후방 수비수도 하프라인 근처까지 올라와 한국의 공을 사전에 뺏어냈다. 이에 한국은 몇 차례 역습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공격조차 전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독일이 골 사냥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은 단조롭고 템포 느린 공격에 번번이 한국 수비수들과 조현우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골이 터지지 않았음에도 축구팬들은 아직까진 16강 진출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별다른 소득 없이 0대 0으로 전반전이 끝났다. 하프타임 동안 선 자리에 주저앉아 쉬거나, 맥주를 사러나갔다 온 독일팬들의 얼굴에서 조금씩 근심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후반전이 시작됐다. 후반 시작 5분 만에 중계화면 한 구석에 있던 F조의 또 다른 경기 스웨덴과 멕시코의 점수표에서 스웨덴 점수가 1점 올라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독일 입장에서도 반드시 골을 넣고, 승점 3점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답답한 전개로 공격의 물꼬가 전혀 터지지 않자, 관중들 사이에서 벤치의 공격수 자원인 “마리오 고메즈”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 후반 18분 케디라를 대신해 고메즈가 들어가자 기대감에 짧은 환호가 나왔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곧바로 스웨덴의 점수판이 ‘1’에서 ‘2’로 바뀐 것이다. 더운 날씨에 경기 시작 전부터 마신 술기운까지 올라오면서 차분하던 독일팬들 사이에서 조금씩 고성과 욕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성을 참지 못한 일부 관중들은 상의를 벗어던졌다.
경기 중간 독일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현지 분위기가 좋지 않아져 기자는 빨간옷 대신 독일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사진=민웅기 기자
미드필더 고레츠카와 수비수 헥터를 빼고 공격수 토마스 뮐러와 율리안 브란트를 투입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기자는 빨간티 위에 미리 준비해온 독일 유니폼을 조용히 꺼내 입었다.
스웨덴 멕시코 경기는 스웨덴이 한 골을 더 추가하면서 3대 0으로 크게 앞서나갔다. 이제는 독일이 승점 3점을 얻기만 한다면 멕시코 대신 16강에 올라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 선수들의 단조롭고 지루한 공격 전개에 골이 터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리응원장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갔다. 일부 팬들은 응원용 풍선스틱을 집어던지고, 플라스틱 콜라병을 던지기도 했다. 어디서 어떻게 반입했는지 병이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경기 초반 한국인 기자를 바라보는 독일인들의 호의적인 시선은 보이지 않고, 거북스런 이방인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독일팬들과 몸이 부딪히는 것도 시비가 붙을까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한국은 16강 진출이 쉽지 않다면, 그냥 독일이 골을 넣고 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
‘기대반 우려반’ 긴장감 속에 오히려 골을 넣은 쪽은 한국이었다. 후반 추가시간 얻어낸 코너킥 기회에서 경합하다 흘러나온 공이 김영권에게 연결되면서 골을 기록한 것이다. 기뻐서 소리를 지르려다, ‘움찔’ 다시 소리를 삼켰다.
하지만 심판진이 처음에는 오프사이드 판정을 내렸다. 머리를 감싸 쥐던 거리의 독일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기자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골로 기뻐하는 대형 스크린의 한국팬들과 대조적으로, 베를린 거리응원에 나선 독일팬들은 낙심하며 하나 둘 경기장을 떠나고 있다. 사진=민웅기 기자
그런데 갑자기 주심이 VAR을 확인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 대형 스크린으로 골 장면 리플레이가 나왔다. 마지막 크로스의 발을 맞고 김영권에게 연결됐기 때문에 전혀 오프사이드가 아니었다. 명백한 골이었다. 기자도 알고, 옆의 독일팬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팬들은 제발 오프사이드이길 기원했다. 이러한 염원과는 달리 현명한 심판은 VAR 판독 결과 골로 인정했다.
독일의 16강 탈락이 9부 능선을 넘은 상황. 절망하고 분노한 팬들이 한 명 두명 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나운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왜 센터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섰을까’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눈을 내리깔고, 혹시나 몸이 부딪힐까 어깨를 접었다.
그 와중에 노이어 골키퍼는 자신의 골대를 비우고 한국 진영까지 튀어나오면서 오히려 손흥민에게 한 골을 더 헌납하고 말았다. 손흥민과 한국 선수들은 러시아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셀레브레이션을 펼쳤지만, 기자는 독일에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80년 만의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 믿어지지 않는 듯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거리응원 독일팬들. 사진=민웅기 기자
결국 한국과 독일의 경기는 2대 0 한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거리에 모인 독일 축구팬들도 80년 만의 조별리그 탈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한국인이 독일팬 누구 한 명 붙잡고 인터뷰를 시도할 상황도 아니었다. 실제 기자가 절망하는 독일팬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밀자, 한 명이 버럭 화를 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를 쏟아냈다. 안전요원이 다가와 독일팬을 진정시키고서야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다. 안전요원도 기자에게 “그러지 마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결국 기자와 악수를 하며 일은 마무리됐지만, 독일 남성의 얼굴에는 여전히 울분이 가득해 보였다.
만약 기자가 독일 유니폼으로 갈아입지 않고, 기존의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팬들이 버리고 간 응원용 풍선스틱만이 땅바닥에 남아있다. 사진=민웅기 기자
한국이 이겨도 이겼다고 기쁜 내색조차 못하고, 결국 기자는 눈치를 보며 거리응원 현장을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한 편 속으로는 열심히 싸운 한국 선수들의 선전이 자랑스러웠다.
#후기
80년 만에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뒤 망연자실해 하는 팬들 사이에서 독일 국기를 들고 이후의 독일 축구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진=민웅기 기자
“축구는 져도 삶은 계속된다.” 절망적이고 험악하던 거리응원장의 분위기도 잠시, 강성 축구팬들이 떠나자 거리응원 주최 측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댄스음악과 EDM을 틀었다. 이에 현장에 남아있던 일부 독일 축구팬들은 길거리에서 댄스를 추며 거리응원 행사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베를린=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