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년 방한한 미국의 카터 대통령(오른쪽)과 박정희 대통령이 나란히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80보도사진연감] | ||
‘아마도 여러분들 중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2년 전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그리고 전세계에 대해 핵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핵 개발팀을 재가동시키는가. 나도 그 점은 인정한다. 인정하면서 왜 잘못된 결정을 내렸느냐.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지난해 이맘 때 판문점에서 일어난 북괴군의 도끼만행사건을 보라. 그리고 그때 미국이 취한 너무나도 유약한 대응책을 보라. 그러고도 과연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 개발 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핵 전문가 갈로아 장군이 우리 나라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의 핵우산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미국이 과연 자기 나라 국민을 희생시키면서 한국을 위해 소련에 대한 핵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보느냐. 만일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속성을 너무나도 모르는 소이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핵을 가져야만이 명실상부한 자주 독립국가가 된다. 국민들 중에는 나를 독재자로 몰아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핵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만 완성되면 미련 없이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 지난해 8월 판문점에서 북한군 병사를 송환하는 모습 | ||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비록 정당 정치 또는 국민적 합의 없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국가안보, 경제 성장 및 국제적 지위 향상 등 그들이 내세운 정책 목표는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다만 유신정권의 권위적 통제는 좀 지나치다. 유신정권은 내부 안정을 위해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국내 반대세력에 대한 과잉 반응일 뿐이다. 그럼에도 권위적 통제에 대한 내부 반발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국민들은 정치 자유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국가 안보와 경제적 복지를 우선하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4천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서는 미 국무성이 공개한 1979년과 80년 사이 한미간 비밀 외교문서로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포함돼 있다.
당시 국무성 한국과장 리치의 기안으로 이루어진 ‘문서번호 040887호’는 미국의 대한 정책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포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 이를 위하여 한미 관계를 강화하고 한국군의 방위력을 증대하기 위한 방안을 구상, 실현한다. 2. 경제 관계에서의 최대의 이익 보장.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 속으로 급속히 그리고 순조롭게 통합되도록 지원하며 대미 무역흑자를 줄이도록 한다. 3. 한국의 정치 발전.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강조하여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정치 발전을 이루도록 적극 노력한다. 4. 앞으로 양국 관계의 관리. 급격히 변화하는 양국 관계를 장기적 안목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방위산업의 역할을 미국의 세계 정책에서 평가하여 한국의 방위정책을 수립하게 한다.
이상 미국의 극히 우호적인 대한 정책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첫째는 이란 혁명, 둘째 니콰라과 혁명, 셋째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꼽고 있다. 79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이 세 가지 사건이 미국의 대한 정책을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북괴군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 대한 한미 연합군의 보복 공격은 폴 번연 작전으로 불렸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제임스 영의 기록이다. ‘펜타곤의 합동 참모본부와 주한 미 사령부 사이에, 그리고 주한 미 대사관과 미 8군 사령부 사이에 상호 경쟁으로 인한 웃지 못할 갈등에도 불구하고 폴 번연 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능숙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한국군 1개 소대와 미군 1개 소대 60명의 공격조가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간 것은 오전 7시 정각. 그로부터 45분 뒤 도끼만행사건의 현장에 문제의 미루나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북한군의 저항도 없었다.’ 진술자가 바뀌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의 증언이다. “작전은 45분 만에 무사히 끝났다. 처음에는 북한군 2백여 명이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집결하는 것이 보였는데 그들은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만 찍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 공격조는 전격적으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뿌리까지 절단하고 그들이 불법적으로 설치한 초소 두 개를 완전히 때려 부순 뒤에 유유히 귀환했다. 시간은 7시55분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두 가지의 의미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첫째는 미국이 한국의 방위 문제를 어느 정도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핵 개발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착을 뒷받침해 준 것이며 그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도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미국은 10·26, 12·12, 5·17과 5·18 등 굵직한 사건의 주변에서 항상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름의 역할이란 과연 그들의 행동의 목적이 결코 한국 국민의 인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우선시한 것이기보다는 미국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전두환에 의해 장악된 한국 군부가 정식으로 자신들의 정권 장악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5·17 및 5·18 당시 미국의 대한 정책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자.연세대 정치학과 이삼성 교수의 분석이다. ‘5·17 사태 이전 미국의 대한 정책의 초점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북한의 남침 위협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여 학생 시위를 진압하려는 강공책에 제동을 걸고 이를 신군부 주도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만류하고 민간 정권 수립으로 나가도록 길을 잡아 주기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국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신군부가 군대의 동원을 크게 확대하여 서울의 봄을 탄압하기 전 몇 주일의 기간, 이를 만류하기 위해 취한 몇 가지 조치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반면에 그간에 있었던 신군부의 정치 개입 분위기를 묵인 또는 방조한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아니면 부인하고 있다. 둘째 한미 연합사 작전 통제권 문제가 있다.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 특전사의 광주 이동 그리고 그 후 20사단의 광주 투입 등에는 한미 연합사의 작전 통제권 문제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으나 미국의 해명은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셋째 미국은 전두환의 12·12 세력이 광주 사태를 무력으로 해결한 뒤에도 이들을 비판적으로 대했으며 민간 정권으로 나갈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미국은 광주 사태 직후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해 이중적인 신호를 보냄으로써 사실상의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한미 외교 비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86년 3월 <동아일보> 김진현 논설위원의 ‘한국과 레이건 독트린’이라는 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지구상에서 자원 인력 기술 영토 모든 면에서 가장 자급 자족 구조를 갖춘 미국이 자유 무역이상의 선봉장인 역설과 같이, 외교에서도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미국이 뿌리 깊은 이상 외교, 자유와 인권 외교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나라와 가장 깊고 넓은 외교 관계에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지금의 레이건 독트린이 미국 이상 외교 부활이라고만 해석한다면 그야말로 구상유취한 해석이다. 이상을 위한 개입이라는 명분이야 어떻건 현실에는 권력 외교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미군 철수라는 안보 보호의 장벽을 허물며 인권을 요구한 카터와는 달리 안보 우산을 거듭 약속하며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레이건 독트린은 미국의 대한 외교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리라는 것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여야간에 레이건 독트린을 이 나라 민주화와 안보를 위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는 의지와 능력과 지혜에 달려 있다. 여야에 기회와 동시에 분명한 선택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오늘 기성 정치인과 지성인이 지은 역사적 과오는 인간성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자유라는, 억누를 수 없는 보편적 가치를 인간 사회 국가 민족의 차원에 전체적으로 일관된 체계로 통합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시민의 자유, 문화의 자유, 정치 선택의 자유, 국가의 자유, 민족의 자유를 가지런히 우리 모두의 생존의 장 위에 꿰어매지 못한 데 있다.
우리 모두는 자유의 보편적 가치를 개인이나 전체로서 얼마나 진실로 신봉하고 있는가. 그 값 있는 자유를 얼마나 나 그리고 우리 책임아래 성취하려 하는가. 외국에서 외교로 자유를 물어 오기 전에 우리가 자문 자답 자행해야 한다.’ 오늘 이 시각에도 미국은 우방국으로서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시각은 우리의 시각과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