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12월12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여의도 유세에서 ‘중간평가’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그는 올림픽 직후 국 민의 평가에 따라 대통령직 사퇴를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였으나 89년 야권의 중간평가 요구를 끝 내 회피했다. | ||
노태우 김대중의 단독 정상회담 현장이다. 89년 3월10일 오찬을 곁들여 진행된 청와대 회담의 주요 논의 대상은 다음과 같은 6개 항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중간평가 실시 여부, 둘째 전두환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의 국회증언 문제, 셋째 5공비리 및 광주사태 관련자 처벌 문제, 넷째 지방자치제, 다섯째 광주치유 문제, 여섯째 국민 대화합.
이 중에서 첫번째 항목인 중간평가 실시 문제와 관련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발언이다.
“중간평가는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약속인 만큼 반드시 실시돼야 한다 하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김 총재는 잘 모르겠지만 중간평가를 빨리 받으라고 하는 여론이 점차 높아가고 있다. 자꾸만 미루다가는 파괴 세력들에 의한 혼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일부 재야나 학생세력들이 선동하기 전에 조속히 실시해서 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높아가고 있고 심지어는 종교계에서조차 정부가 너무 많이 참는다 하는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할 수야 있겠는가. 가능하면 여야 대결과 같은 국력의 낭비가 없는 가운데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게 본인의 생각이니까 야당에서도 중간평가를 통해 새출발 하겠다고 하는 정부의 뜻을 이해해서 적극 도와주기 바란다.”
이에 대한 김대중 총재.
“어제 저녁 어느 석간신문을 봤더니만 노재봉 특별보좌관인가, 그 사람이 기고한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정권의 신임을 연계한 중간평가는 헌법 위반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라 해도 정권의 신임을 전제로 한 중간평가는 실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중간평가는 정권의 신임을 연계한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오히려 이렇게 되묻고 싶다. 김 총재는 대통령이 헌법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권의 신임을 연계한 중간평가는 헌법에 없다. 따라서 내가 만일 정권의 신임을 걸어 놓고 중간평가를 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헌법 위반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중간평가는 실적에 따라 국민들의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지 정권의 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이고 국민들까지도 여권에서 말하는 중간평가는 정권의 신임이 포함된 평가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그렇게 알아두고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둘 일이 있다. 중간평가는 대통령인 나와 국민 사이의 하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국민과의 합의에 따라 결정될 일일 뿐 야당에서 나서서 해라, 하지 마라 간섭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록상으로 이날 두 사람의 회동에서 중간평가와 관련된 양자의 발언은 여기서 일단 끝나고 있다. 그 어떤 합의도 도출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통일민주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는가.
해답을 6공 청와대 Y비서관으로부터 들어 보자.
“그동안 통일민주당은 시종일관 중간평가를 실시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갔다. 그렇게 해서 통일민주당의 선명성을 부각시키려는 당략이었다. 반면에 평민당과 김대중 총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태도가 상당히 애매모호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엔 선 지방자치제 실시, 후 중간평가 이렇게 주장했다가 그해 89년 1월28일 연두기자회견에서는 중간평가는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만큼 반드시 실시하되 6공 정권의 신임이 연계된 국민투표방식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이렇게 바뀌었다. 그랬다가 이것이 다시 또 바뀌어서 국민투표 불필요론으로 백팔십도 뒤집혀 버렸다.
결국 그 후의 상황 전개로 봐서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중간평가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런 사실은 평민당 김원기 원내총무의 배경 설명에도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때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만일 여권이 우리 김대중 총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중간평가를 강행한다면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중대한 결심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원기 원내총무의 당시 증언에서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중대한 결심이란, 김영삼 총재를 모시고 야권을 통일하여 중간평가에 대비하는 것은 물론, 차기 대선에 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야 3당의 한 축인 신민주공화당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는가.
김종필 총재의 발언.
“그런 거 헌법에도 없는 거다. 헌법에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고 또 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만일 그래도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6공 정권이 반쯤 굴러간 뒤에 90년에나 가서 생각해 봐도 결코 늦지는 않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야 3당 총재는 3당간의 의견의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 89년 3월4일 총재회담을 열고 조율이라기보다는 봉합에 가까운 어정쩡한 합의를 도출했다.
▲ 노재봉 당시 특별보좌관은 정권의 신임과 연계한 중간평가는 위헌이라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기고 했다. | ||
첫째, 6공 정권의 중간평가는 노태우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정권의 신임이 연계된 국민투표로 실시되어야 한다.
둘째, 단 그 시기는 5공 청산, 민주화 실천 등 국민이 평가할 만한 실적을 올린 후 실시되어야 한다.
셋째, 만일 노태우 정권이 이와 같은 야 3당의 결의를 무시하고 중간평가를 강행할 경우엔 우리는 이것을 노 정권의 5공 청산 및 민주화 실천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국민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따라서 우리 야 3당은 모든 민주 국민과 함께 노태우 정권 불신임이라는 강경 수단으로 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다섯째, 우리 야 3당의 요구에 따라 중간평가가 이루어질 경우 모든 국민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공정한 선택이 보장되는 국민투표법의 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끝으로 여섯째, 기왕에 우리 야 3당이 요구하고 있는 5공 청산을 위한 특별검사제의 도입은 노태우 정권이 최규하,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5공 비리 및 광주 관련 핵심 인물들에 대한 처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요 여부를 결정할 것이며 잠정 보류할 것이다.
이에 대한 당시 원로 C옹의 진술이다.
“그해 3월 야 3당 총재들이 모여서 결정한 여섯 개의 합의 사항이라는 거는, 이것이 중간평가를 하라는 것인지 하지 말라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첫번째 항목에서는 중간평가는 노태우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정권의 신임을 연계한 국민투표로 실시돼야 한다, 즉 중간평가를 하라는 거였다.
그런데 두번째 항목에서는 중간평가를 실시하되 그 시기는 5공 청산, 민주화 실천 등 국민이 평가할 만한 실적을 올린 뒤에 실시해야 한다. 그래 놓고 세번째 항목에 가서는 중간평가를 아무 때나 실시한다면 이것은 5공 청산과 민주화 실천이라는 국민적 여망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므로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결국 하지 말라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중간평가를 하자는 건지, 하지 말자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진술이다. 89년 3월10일 노태우 김대중 양자 회담에서 모종의 밀약이 이루어졌다는 이른바 ‘노태우 김대중 묵계설’의 배경이다.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증언이다.
“이날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밝힌 정권의 신임이 연계되지 않은 단순한 정책평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물었다.
‘정권의 신임이 연계되는 중간평가는 헌법 위반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만일 6공 정부의 신임을 걸고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면 그것은 곧 현직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자 노 대통령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중간평가의 형식을 나한테 밝혔다. ‘대통령이 헌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내가 대선 중에 제의한 중간평가를 받겠다 하는 약속은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반드시 지켜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위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구상하고 있는 중간평가는 6공 정권의 신임이 걸린 국민투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치적을 묻는 단순한 정책평가에 머물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밝혀 드린다.’ ”
그렇다면 89년 3월10일 노태우 김대중 양자 회담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가.
정계 원로 C옹의 주장이다.
“먼저 김대중 총재의 발언.
‘광주 문제에 대해서는 전두환씨가 사과하고 정부에서도 같은 내용의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법부나 언론에서도 유감의 뜻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대답이다.
‘전두환씨는 이미 사과의 뜻을 표명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사과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사법부와 언론이 유감을 표시하는 문제는 대통령이라 해도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김 총재와 생각을 같이 한다. 광주의 명예를 회복하는 결의안을 국회에서 채택하면 정부에서는 적절한 보상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거다.’
여기서 다시 정계 원로 C옹의 주장이다.
“마지막 여섯번째가 국민 화합과 관련된 사항인데 노태우 김대중 묵계설은 바로 여기서 나온 거다. 어떻게 나왔느냐. 청와대에서 발표한 두 사람의 대화록엔 이렇게 돼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발언이다.
“지난 선거를 통해서 망국적 지역감정이야말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나는 김 총재에게 요청한다. 광주 문제의 마무리를 포함해서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민화합을 이룩하는 데는 정부 여당의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못지 않게 야당의 협력, 특히 김 총재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야겠다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으니까 세 야당 총재들이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고 대통령인 이 사람을 도와줘야겠다 하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이 부분 김 총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김대중 총재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청와대에서 발표한 대화록엔 이렇게 돼 있다.
“대통령의 생각에 동의한다.”
바로 이것이 노태우 김대중의 밀약설, 묵계설을 낳게 한 근거가 된 것이다.
당시 김대중 총재.
“그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물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권의 신임을 연계한 중간평가는 헌법 위반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권에서 말하는 정권의 신임을 포함한 중간평가는 위헌 사항이 되는데 대통령으로서 헌법위반행위를 할 수 있는가.
그러자 노 대통령은 나한테 약속했다.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위반할 수는 없다. 자신이 말하는 중간평가는 6공 정권의 신임이 걸린 국민투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치적을 묻는 단순한 평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