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5월 근우회 창립총회 모습.
이날 서울 종로 한복판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관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기독교청년회관은 당시에도 개화파 지식인들과 청년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다. 사람들이 붐비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날 만큼은 좀 더 특별했다.
회관 안팎에서 웅성대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성일색이었던 것. 회관 안에는 단정한 머리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어림잡아도 약 1000여 명. 이날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왜 모였던 것일까. 이날 이곳에서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근우회? 그게 도대체 뭐 길래. 근우회는 1927년 5월 27일 조선 땅에 처음 들어선 전국적 여성운동조직이었다. 이른바 조선 최초의 페미니즘 단체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 이미 이 땅에 전국 규모의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놀랍지 아니한가.
근우회의 발간 잡지 ‘근우’의 1927년 5월 ‘창간호’.
그 배경에는 이른바 ‘배운 여자’들이 있었다. 점차 봉건제를 벗어나 개화기를 맞이한 조선 땅에 신식교육이 등장했다. 이는 남성들만의 전유물만이 아니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여학생들을 위한 신식교육 과정이 들어섰다. 심지어 바다 건너 유학길을 다녀온 여성들도 등장했다.
그들 사이에선 엘렌 케이의 저서나 입센의 ‘인형의 집’과 같은 여성해방 주제가 담긴 서적들을 섭렵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억압받던 여성의 현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아를 자각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날 종로에 모이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근우회의 주축은 신식교육으로 무장한 ‘배운 여자’들이었다. 발기인은 총 41인이었다. 차미리사, 김선(이상 조선여자교육회), 김활란, 유각경(이상 YWCA) 등 민족·기독교 진영은 물론 허정숙, 박원희, 정종명, 정칠성, 주세죽(이상 조선여성동우회) 등 사회주의 진영 여성들도 있었다.
그 구체적인 직업들을 살펴보자면 교육자, 간호사, 의사, 기자, 경영인 등 그 시절 내로라하는 인재들 일색이었다. 근우회는 ‘여성’이란 테제 속에서 좌와 우를 아우르는 합작 조직으로서도 의미가 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이 작성해 자체 제작한 잡지 ‘근우’ 창간호를 통해 밝힌 이른바 ‘근우 선언문’은 그들의 진취적인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근우회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
지난 5월 26일 오후 서울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포털사이트 다음의 ‘강남/홍대 성별에 따른 차별수사 검경 규탄시위’ 카페를 통해 모인 여성들. 91년 전 인근 종로에서 모였던 선배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연합뉴스
조선 땅의 페미니스트들은 오늘 날 대학로에 운집하는 후배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이미 한 세기 전, 여성의 해방을 위한 단결을 적극 주문했다. 그 외침이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못지않은 호전적 에너지를 풍긴다. 그들이 창립 2년 만인 1929년 전국대회 당시 마련한 ‘행동강령’은 과연 이 내용이 한 세기 전 내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보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우회 행동강령(1929) -교육의 성적 차별 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정치적 일체 차별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및 결혼․이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 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4주간, 산후 6주간의 휴양과 그 임금 지불 -부인 및 소년 노동자의 위험노동․야업 폐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노동자․농민 의료기관 및 탁아소 제정․확립 |
그들이 한 세기 전, 제정한 행동강령은 후배들로서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채 진행형인 과제들도 있다. 지금도 여러 시사점을 주는 내용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미 그 시절 여성들의 제도적 차별 철폐뿐만 아니라 남녀임금 차별 철폐와 경제적 이익 등 실질적인 여권 신장을 주장했다. 또 여성들의 산전·산후 휴가를 주장했으며 일하는 여성을 위한 육아시설 확립을 얘기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여전히 남녀 간 임금 차이는 상당하며, 많은 여성들이 육아문제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상기할 부분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활동은 짧고 굵게 끝났다. 창립 4년 만인 1931년 ‘근우회’는 홀연히 사라진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의 한계 탓이 컸다. 이념을 달리했던 양 진영의 여성들은 각각 ‘문맹 퇴치 및 계몽’과 ‘사회주의 이념 확충’ 등 사이에서 방향성을 달리하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고성준 기자 = 6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YMCA빌딩 전경. 91년 전 이곳에서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지금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전소된 후 1967년 재건축된 것이다. 2018.6.29
그리고 일제 역시 깨어있는 여성들의 공개적인 민족적 활동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 격이었다. 일제는 신간회를 견제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한데 이어 근우회 역시 탄압해 고사에 이르게 했다.
‘근우회’의 활동기간은 4년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후세에 남긴 영향은 상당하다. 그들은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춘 최초의 여성단체였다. 오로지 여성의 힘만으로 이뤄진, 또한 그들이 도출한 앞서의 선언문과 행동강령 등은 추후 이 땅의 길고긴 여성해방 운동사의 길잡이가 됐다.
게다가 근우회의 주요 멤버들은 단체가 해산되고 난 뒤에도 교육과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우먼파워’를 이끌었다. 오늘날 혜화동에 모이는 여성들 이전에, 이미 그녀들이 있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언더커버]조선페미열전2-조선 페미 남북열전! ‘나혜석VS허영숙’ 이야기 이어짐
언더커버-언더커버는 ‘일요신문i’만의 탐사보도 브랜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커버스토리를 넘어 그 안에 감춰진 안보이는 모든 것을 낱낱히, 그리고 시원하게 파헤치겠습니다. ‘일요신문i’의 탐사보도 ‘언더커버’는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