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당시 JP는 보혁구도로의 정계개편 을 주장했는데 이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상황 과도 비슷하다. | ||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한 18년 간은 비교적 정계개편이 적었지만 그래도 절대 권력의 지배 기간 중에도 장기집권을 향한 몇 차례의 정계개편은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집권 말기의 3김씨의 합종연횡, 노태우 정권 말기의 3당 합당, 김영삼 정권 말기의 DJT 연합을 겪어 왔다.
과연 김대중 대통령 말기인 금년에는 어떠한 모습의 정계개편이 일어날 것인가. 정계개편을 먼저 언급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의 주장은 지역감정을 넘어선 보혁구도의 정계개편이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역시 구도상의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결국 이념과 정책을 기조로 보수와 개혁의 양대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정계를 개편하자는 주장인데, 이는 공교롭게도 지난 90년 3당 합당의 목적과 같다는 것이다.
역사가 10여 년 만에 반복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정치가 10여 년을 헛되이 보낸 것일까. 김대중 정권의 지난 4년을 돌아보면 허약한 정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시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3당 합당으로 탄생하여 군사 정권의 연장이라는 굴레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고 한다면 김대중 정권은 그 성격상 지역 기반이나 이념적 측면에서 사실상의 정권 교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이전 정권과 결탁한 세력의 조직적이고 끈질긴 저항과 새 정권의 인재 풀(Pool)의 한계로 인해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 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초기 정계개편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될 시점, 박준규 당시 자유민주연합 고문의 얘기를 들어보자. 90년 3당 합당 시절과 98년의 정계개편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내가 민정당 대표할 땐데,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쩔 수 없이 부분적이나마 정계개편에 관여했는데 한마디로 90년의 정계개편은 노태우 대통령을 위한 개편이었다. 당시 정국 최대의 현안은 5공 청산인데 4당 체제에서 여소야대가 되고 보니 도무지 청산이 안돼.
그래서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이러다가는 임기 5년을 5공 청산 하다가 끝내게 될지도 모르니까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통해서라도 정국구도를 정상화시켜서 정면 돌파를 해야겠다 이랬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IMF 6개월에 벌써 실업자가 몇 명인가.
이걸 추스르자니 구조조정을 앞당겨서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수적인 열세도 기초적인 주도 세력조차 형성이 안되고 있어 그러다 보니 말만 개혁일 뿐 되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개혁을 포기하나 그럴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 정계개편을 하자 이렇게 된 것이다.”
정리를 해 보자. 90년의 정계개편은 여소야대의 4당 체제에서 정국 운영에 실패한 노태우 대통령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당리당략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와 자민련 등 여권에서 추진했던 정계개편은 정권적 차원이 아닌 국가적 필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90년의 정계개편 때는 3저 호황에 힘입어 경제가 탄탄대로에 올라서 있었으나 98년 당시는 YS 정권의 실정으로 경제가 파탄 상태에 빠져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선의 수단이자 방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3당 합당은 당시로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누구와 합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당시 합당을 추진하던 당사자 격인 박철언 정책보좌관으로부터 들어보자.
“89년 2월과 3월 무렵 5공 청산 마무리 문제, 그리고 중간평가 유보 등과 관련해서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하고 자주 만났다. 그래서 알게 된 일이지만 김대중 총재는 어떤 분인가 하면 처음에는 반대하다가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면 끝까지 저지하려고 하지는 않는 분이었다.
또 이 분은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 분이었다. 93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적에 일부 언론에서 89년 일을 들춰내 가지고 중간평가 유보해 준 대가로 거액의 반대급부가 있었을 것이다 하는 보도를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그때 그 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번 접촉했지만 단돈 1원도 건넨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김 총재가 북경 발언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20억원을 받았다고 했을 적에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 분의 인격하고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기자가 물었다.
“89년 당시 중간평가 유보와 관련해서 김대중 총재를 자주 만났다고 했는데 중간평가 유보와 그 후에 일어난 3당 통합은 서로 맞물려 있는 것 아닌가?”
“중간평가 유보와 3당 합당은 서로 맞물려서 진행된 얘기는 아니었다. 그거는 그거대로 독립된 문제로서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89년 4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통일 민주당 서석재 사무총장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를 매수해서 후보 사퇴를 시킨 사건, 즉 동해 보궐선거 후보 매수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좀더 깊이 파헤쳤더라면 아마 상당한 파장이 있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 그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사건은 완전히 공개되질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일반에는 알려지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야당 수뇌부의 입장을 감안한 상태에서 법 진행과 정국 운영을 병행했기 때문인데 아마 이렇게 이해하면 될 거다. 당시의 정국 상황엔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후보 매수하는 데 쓰여진 5천만원의 출처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냥 덮어버리도록 지시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다.
‘그 부분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야. 더구나 상대는 우리가 시방 협조를 받을라고 하는 제 2야당의 총재 아니야. 여러 말 할 거 없어. 법 집행에 문제가 좀 있다 하더라도 그냥 덮어 버리는 게 좋아. 베풀면 돌아오게 돼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보수 대 혁신의 정계개편을 주장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왼쪽).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오른쪽) 역시 구도상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 ||
“당시 사건 당사자였던 서석재 의원은 그 사건과 관련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동해 보궐선거 후보 매수 사건은 6공 정권의 마지막 정치 공작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우리 자민련의 김현욱 의원은 선거를 앞두고 출판 기념회를 하면서 참석자들에게 회덮밥을 제공한 죄로 구속됐다. 동해 사건을 같은 잣대로 놓고 한 번 재보라. 후보 사퇴시키기 위해 회덮밥이 아니라 거금 5천만원이 오고 갔는데 이게 공작 운운할 그런 사건인가.”
서석재 의원과 이홍섭 후보의 동해시 백사장 대화를 보자.
서석재 의원의 질문.
“후보 사퇴를 상의해서 한 것인가?”
이홍섭 후보의 답변이다.
“꼭 그런 거는 아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이유를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또 하나, 그런 사실을 최각규 사무총장하고 상의했는지 알고 싶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후보 사퇴는 내 스스로 결정한 일이고 사퇴 이유 등에 대해서 최각규 사무총장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당에 대한 불만이 후보 사퇴의 이유인데 선거 총책인 사무총장에게 상의할 수 있겠나.”
“그렇다면 더더욱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후보 사퇴의 이유가 당에 대한 불만이라고 했는데 어떤 이유인가.”
“그걸 꼭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만일을 위해서 선을 분명히 그어 둘 필요가 있다. 이 후보가 스스로 사퇴했느냐, 아니면 누군가의 종용이나 강요에 따라 사퇴했느냐, 그것도 아니면…”
“돈을 받고 사퇴했느냐? 좋다. 정 그렇다면 사퇴 이유를 밝히겠다. 애당초 우리 당은 이번 선거에 임하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전제 하에 선거자금 등 충분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오늘이 며칠째인가. 투표 날이 내일 모레인데 아직까지도 전혀 지원이 없다. 그래 놓고 일방적으로 다그치기만 한다. 이겨야 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나도 이제 지쳤다. 더 이상 감당할 방법이 없다.”
“그 말은 후보 사퇴 결심은 확고하다는 뜻인가.”
“명분이 있어야 하므로 기자 회견을 자청해서 이렇게 말하겠다. 야권의 승리를 위해 후보를 단일화하기로 합의했다. 통일민주당의 이관형 후보를 밀겠다.”
“당신의 용기에 감사한다. 위로금 명목으로 5천만원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서석재 의원이 주장하는 동해시 후보 매수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는 자신의 결정에 따라 사퇴했다. 여기엔 그 어떤 외압도 없었으며 금품수수 등의 공작은 더욱 아니다.
물론 후보 사퇴의 이유는 있었다. 선거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 당에 대한 불만이 그것이다. 분명히 밝혀 두지만 우리 통일민주당이 이 후보에게 제공한 5천만원은 후보 사퇴를 전제로 한 공작금이 아니라 후보를 사퇴한 이 후보에게 제공한 위로금인 것이다.
한편, 1990년의 정계 개편, 3당 합당을 위한 물밑 교섭의 시작은 언제쯤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3당 합당의 주역인 박철언 청와대 정무수석은 그때가 88년 4·26 총선이 끝난 다음날 4월27일 아침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당시 개표 결과를 보고 민정당의 참패에 크게 낙담해 있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정계개편을 제의한 것이 3당 합당의 단초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3당 합당이 가시권내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된 것은 89년 초 김대중, 김영삼 양 총재와 직접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3당 합당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민정당의 윤길중 대표였다. 잇달아 국회의장 김재순 의원의 스페인 마드리드 발언이 나오고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의 부여 발언에 이어 민정당 대표였던 박준규 의원의 캐나다 오타와 발언이 나왔다.
네 사람의 발언 내용은 거의 비슷해서 정계 개편, 내각책임제 개헌이었는데 같은 내용의 발언이 거의 동시에 나온 것은 상호간의 그 어떤 조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 대해 박준규 의원은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조율은 없었다. 이심전심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발언을 캐나다에서 한 거는 정치인이 밖에 나가서 무슨 말을 하면 국내발언보다 크게 비중을 두기 때문에 그랬다. 내가 그때, 오타와에 간 것은 문제의 발언을 하기 위해 그랬다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3당 합당에 대해 김종필은 서막을 열었고, 김대중은 정책 연합을 주장했고, 김영삼은 그냥 올라타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 야당 총재들은 원칙적으로 정계 개편에 동의하면서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질 한 차례의 정계 개편의 회오리의 방향을 예측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회창과 노무현 두 후보간의 여론 조사 결과는 현재까지는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고 있다. 월드컵이 끝나고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 때쯤이면 그때부터 우리의 정치판은 더욱 뜨거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