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3월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박철언 정책보좌관으로부 터 ‘3당이 아닌 4당 합당’이라는 예상 못했던 제의를 받지 만 거부하고, 대신에 ‘중간평가 유보 동의’라는 선물을 준 다. 사진은 88년 5월 당시 야3당 총재의 밀담장면. <89보도사진연감> | ||
“89년 3당 합당의 물밑 교섭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통일민주당에는 좌동영 우형우로 표현되는 김동영, 최형우 등의 가신 그룹이 형성돼 있었다. 그들에 비해 황 의원은 중도 승차한 일종의 외인부대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해서 3당 합당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는가.”
황병태 전 의원의 답변.
“1년 남짓 3당 합당 작업을 추진하면서 YS 친위그룹과의 마찰이 상당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일종의 외인 부대와 같은 나로서는 뛰어넘을 수밖에 없어서 맡은 일 이외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등의 거리 조정으로 극복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쉽게 물러섰느냐. 아니다. 반목과 질시 그리고 조직적인 견제가 엄청났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엔 일절 관여 안하고 정책 결정에만 참여했는데, 다행히 YS의 도움으로 철저하게 보안이 이루어져서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모든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런 얘기까지 나왔다.…”
“‘어데서 떠돌이가 굴러 들어와서 당을 팔아 먹을라고 하느냐. 황병태가 통일민주당을 팔아 넘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동교동 지하실 서재로 돌아가자. 비슷한 입장의 박철언 전 의원의 설명이다.
“그 당시 1990년도의 정계 개편이라는 것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89년 3월 수차에 걸쳐 이 지하 서재에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회동한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어떤 방법으로 김 총재를 설득하여 중간평가 유보에 동의를 얻어냈는가. 그리고 보혁 연합이라는 자신의 그랜드 디자인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는가.
이때 김대중 총재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그때가 85년 가을. 그리고 4년 뒤인 89년 2월 및 3월 정계개편, 3당 합당과 관련하여 김 총재를 설득하게 된다.
박철언 정책보좌관.
“총재님, 죄송합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하셨나요?”
“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기 아니라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는 중에 처음으로 의견의 차이가 드러난 것 같아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의견의 차이가 드러났다?”
“기억하시는지 몰라도 4년 전 85년 가을에도 그랬고 또 이번에도 그렇고 제가 총재님 모시고 말씀을 나누면서 놀란 것은 총재님의 생각이 곧 제 생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랬다는 얘깁니까?”
“모든 분야에서 다 그랬습니다. 대북관계, 민족문제, 통일문제 그리고 국내문제에서는 우리 정치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에 이르기까지 거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그런데….”
“정계개편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얘깁니까?”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기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정치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4당 체제에서 여소야대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어요. 그러나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이것을 인위적으로 뜯어고친다면 잘못을 이중적으로 저지르는 결과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런 생각은 안해봤소?”
“말씀을 그리케 하시는 걸 보니 제가 설명을 잘못 드린 것 같습니다.”
“나가 말씀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거는 4당을 합쳐서 하나의 당으로 개편하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잘 되고 잘못 되고가 있겠습니까?”
“4당을 합쳐서 하나의 당으로 개편을 해요?”
뜻밖의 제안에 놀라는 김대중 총재.
“박 보좌관. 나가 비로소 박 보좌관의 원대한 구상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역시 마찬가집니다. 박 보좌관은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나는 이래 저래 30년이 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 보좌관은 여권에서 정치를 시작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야당 정치인으로 출발했어요.
그렇다고 뭐가 다르냐. 다른 나라하고 달라서 이 나라에서는 여야의 차이가, 입장이, 풍토가 심지어는 생활 그 자체까지도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속에서 평생을 야당 정치인으로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별안간 정치적 입장을 바꾼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박 보좌관, 말씀드린 대로 나가 박 보좌관의 생각을 압니다. 이해해요. 그러나 입장이 그렇질 못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심히 유감입니다. 그래서 얘긴데 대신 내가 선물을 하나 드리겠소.”
“선물을 주십니까? 어떤 선물입니까?”
“중간평가를 유보하자고 했지요? 동의하겠소.”
당시로서는 참으로 커다란 선물이었다.
▲ 서석재는 ‘후보매수’를 여과없이 써대는 언론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 ||
“최소한 동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도동 가신들 중에서도 YS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애당초 YS와의 인연은 어떤 계기로 맺어졌나.”
서 의원은 간추려 대답하고 있다.
“4·19 때 동아대학 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했는데 그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좀 있었다. 좀 있는 기 아니라 많이 있었다. 그러다가 66년인가, 7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영호라고 YS의 사촌동생이 있는데 이 친구가 YS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보니까 그때 YS가 여간 고전을 하고 있는 기 아니었다.
박정희가 차기 대선에 대비해 YS를 낙선시키려고 금권 관권 총동원을 했는데 감당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래 안되겠다 싶어서 도와드리기로 하고 조직부장으로 선거판에 뛰어 들었는데 그렇게 된 거는 YS의 지역구가 동아대학이 포함되는 부산 서구였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보고 참여한 것이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YS는 당선이 됐고, 서구에서 6선을 했다. 그때마다 조직부장을 맡아 지역구 관리를 맡아 했는데 YS하고의 인연은 그리케 해서 맺어진 거였다.”
다시 기자가 물었다.
“상도동 가신들을 평가해 보면 고 김동영 의원은 조직과 세력을 그리고 추진력은 최형우 의원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평인데 그래서 그런지 좌동영 우형우가 있고, 좌병태 우병태가 있다. 그러나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진 서석재 의원에게는 좌석재 우석재라는 말이 없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다시 서석재 의원.
“그거는 각자 개성이 다르니까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아마 이렇게 보면 될 거다. 나는 정치하면서 억지로 일을 만든다거나 몸 동작을 크게 하는 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모임에 가면 잘 보이지도 않다가 사진 찍을 때는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이런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YS를 모신 지 30년 가까이 되지만 같이 찍은 사진이 없다. 일부러 그런 기 아니라 ‘나도 한 번’ 하고 나서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가 끼어 들어서 찍어 버린다. 기회가 없었다. 그래 지난번 선거 때는 같이 찍은 사진이 필요하다, 요청을 해서 처음으로 둘이 함께 찍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내 있는 그대로를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으만 받는 기고 아니만 그만이다.”
“상도동 가신으로서 YS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 5공 초, YS가 군부 세력에 의해 연금 상태일 때 심지어 서 의원까지도 정부에서 영세민에게 주는 구호 양곡을 타서 연명했다고 한다. 그런 일 때문에 김봉조 의원이 참다못해 YS에게 꼬붕들이 뭘 먹고사는지 알고 있느냐 하고 대든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는데 사실인가.”
“그 일은 이 얘기로써 대체될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때 16년을 상도동에 살면서 이사를 29번했다. 사글세와 전세를 전전하는 그런 셋방살이었다.
어느 때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아이가 다섯인 줄 알고는 방을 못 준다 해서 이삿짐을 마당에 쌓아둔 채 식구들은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상도동 가서 밤을 새우고 그런 일도 있었다.”
그런 서석재 의원이 동해시 후보 매수 사건으로 다시 고생길로 접어든 것이다.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캤으니 물론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은 아니다. 그 점은 깊이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후보 사퇴 목적이었다 하고 써댄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아직도 그 사건에 관한 얘기를 쓸 때는 후보 매수라는 일방적인 고정 관념을 가지고 써대고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 기자가 물었다. 언론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서석재 의원은 답변 형식으로 일본의 언론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에 일본에 가 있을 적에 밤 12시가 넘어서 지진이 났다. 텔레비전을 켰다. 한국 같으면 속보로 편성해 보도했을 낀데 자막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어디에 진도 얼마의 지진이 있었다. 그러나 해일의 염려는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그런데다 더욱 우리하고 다른 거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뉴스에 지진 보도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 물어봤더니 이유가 있었다. 국민들을 불안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가 우리나라에서는 마침 서해 페리호 침몰 사건이 났을 때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매 시간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내보내고 유족들의 통곡하는 모습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기 대체 누구를 위해 득이 되는 일인가.”
동해 사건의 장본인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의 후보 사퇴 변이다. 당시 동해 구성장 여관에서 있었던 기자 회견이다.
“당하고는 전혀 상의가 없고, 저 나름대로 결단을 한 거예요. 단일화를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1억5천만원을 약속해서 5천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돈은 통일민주당에 협조한다는 조건이 아니라 야당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일종의 위로금 또는 협조의 의미로 수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후보 매수금은 아니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설득력은 별로 없지만 이 부분 사건 당사자로 지목되었던 통일민주당 서석재 의원의 주장도 대동소이하다.
“당시 공화당 이홍섭 후보에게 준 돈은 후보 사퇴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그 사건으로 해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바로 후보 사퇴 조건으로 돈을 줬다는 것인데 이거는 성립이 되질 않는다. 법정에서도 내가 다른 모든 것을 인정했지만 이 부분은 끝까지 이의를 제기했다. 이홍섭 후보도 자신이 받은 돈이 매수 조건이 아니었다는 진정서를 재판정에 제출했다. 나는 매수할라고 돈을 준 기 아니다. 형편이 어려우니까 도와달라캐서 도와준 것뿐이다.”
이 부분 신민주공화당 최각규 사무총장이나 김용채 원내총무도 시인하고 있다. 이홍섭 후보는 그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동해를 위해 헌신한 공을 봐서 후보 공천을 했지만 본인은 몹시 생활에 쪼들렸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