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북 밀사 역할을 했던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 오른쪽 은 고 정주영 회장. | ||
북쪽 대표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회담장과 기자실은 남쪽 인원들로 초만원이다. 창밖에는 눈발이 내리고 있다. 군사 분계선 남쪽 지역은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분계선 안으로 들어서자 눈으로 변한 것이다.
“설은 잘 쇠셨습니까?” “우리야 뭐 하루만 놀았디요.” 건물 밖 처마 밑에서 양복 차림과 옷깃에 김일성 배지를 단 반코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로가 잘 아는 사이인 듯 대화의 내용부터 일상적인 것이어서 한 마을 이웃 간에 나누는 정담만 같다. 보도 완장을 두른 기자가 다가가자 대화는 끝이 나고 반코트는 자리를 떴다.
“잘 아는 사람이오?” “알기는 뭘 알아. 여기 상주하는 북한 요원인데 자주 만나니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북한측 대표들이 건너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인 듯한 사람들을 선두로 보도진 등 40여 명이 경계선을 넘어온다. 회의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남북의 기자들은 삼삼오오 둘러서서 수인사와 소식을 전하기에 바쁘다.
“우리 정주영 회장이 평양에서 기자 회견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오던데 그거 편집한 거지요.” “편집이 뭡네까.”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한 거 아닙니까.” “그런 소리 말라요. 기자 회견한 거 전부 고대로 내보냈습네다.” “기자 회견은 1월31일 한 것으로 돼 있던데 방송은 그 다음날 안 나왔소.” “텔레비는 그 날 즉시 내보냈구 라디오만 하루 뒤에 방송했습네다.”
“어쨌든 남북간 경제 협력에 관해서는 처음으로 공개한 것 아닙니까.” “그거야 뭐 정 회장이 자기 고향을 자기 손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니까.” “남북 간에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데 혹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얘기 못 들었소. 그런 얘길 어데서 들었는지 몰라도 기거이 기렇게 해서 이루어지겠습네까. 어렵습네다. 암 어렵디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본 도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가 있던 1월25일 청와대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이 기자실에 전해졌다. 2~3일 전 어디론가 출국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이 전하는 박 보좌관의 행선지는 동남아 지역. 그 시간 박 보좌관은 이른바 대치 공관 지역인 싱가포르에 있었다. 극비리에 북한측 카운터 파트 한시해와 접촉, 막후 교섭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89년의 시점에서 대북 문제의 현황을 알게 하는 <동아일보> 정치부 김재홍 기자의 ‘박철언 밀사 외교, 남북 접촉의 막전막후’다. 기록의 제목이 가리키듯 핵심은 당시 6공 정권의 대북 사업은 청와대 박철언 정책보좌관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외교의 축이 움직이고 있었다.
89년 6월 김영삼 총재의 모스크바 방문엔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소련을 방문 중인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북한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의 모스크바 회담은 그 배경과 내막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앞으로 남북관계의 전망은 물론 국내 정치에 대한 파장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89년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남찬순 기자의 기록 ‘김영삼 허담 모스크바 회동 막후’에서 보자.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남북 관계 전문가들은 이번 김영삼 허담의 모스크바 회동을 팀스피리트 훈련과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 그리고 여학생들의 평양 축전 참가 등으로 해서 남북 관계의 경색이 예고되고 있는 가운데 터져 나온 의외의 사건이라는 데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 김영삼 총재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정재문 의원(왼쪽)이 북한의 연락을 받았다.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부부 와 함께 한 정 의원 부부. | ||
실제로 김영삼 총재는 서울을 출발하기 전날, 5월31일에 이루어진 청와대 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이런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월31일 오찬을 겸한 노태우 김영삼 청와대 회담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된 것으로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김영삼 총재. “예감에 불과하지만 나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저쪽 사람들이 공항이나 숙소 또는 회의장 같은 곳으로 찾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감에 불과하지만 그럴 경우에 나가 취할 수 있는 언행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서울에서부터 평양하고 무슨 교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노태우 대통령은 그때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통령으로서 이리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스크바에 가서 의도적이든 또 우연이든 평양 사람들하고 만나게 되만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무신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김 총재?”
황병태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의 회고성 증언이다. “김영삼 총재의 모스크바 방문과 관련해서 우리 민주당이 평양 사람들하고의 접촉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5월31일 노태우 김영삼 청와대 회담이 끝난 직후였다. 김 총재의 소련 방문에 대비해서 미리부터 모스크바에 가 있었던 우리 당 정재문 의원이 전화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이 부분 우리가 이미 확인한 상황이다. 김영삼 총재가 소련 방문길에 오르기 3일 전, 즉 5월29일 모스크바에 가 있던 통일민주당 정재문 의원은 그곳 주재 북한 대사관 윤태영 참사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온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재문입니다.” “안녕하십네까. 나 윤태영입네다. 설마 모른다고 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여기서 진술자가 바뀐다. 황병태 의원으로부터 당시 통일민주당 정재문 의원.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 윤태영 참사관은 우리 통일민주당의 북한측 교섭 창구였다. 그렇게 된 것은 내가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을 사전 협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적에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오면서였다.
‘서울에서 온 정재문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십네까. 반갑습니다. 난 모스크바 주재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대사관 윤태영 참사관입네다.’ 그때 참사관은 이런 말을 했다. ‘정 의원이 모스크바에 왔다는 사실은 소련 외무성에서 얘길 들었습네다. 기래서 전화를 드렸는데 우리 한 번 만나야 안 되갔습네까.’
비로소 알게 됐다. 이 일에 소련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단 마음을 놓고 그러자고 했다. ‘나는 시간의 구애를 별로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쪽에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보이소.’ ‘팔자 한 번 늘어졌구만. 좋습네다. 기럼 이리케 하디요. 시간은 오는 6월3일 오후 4시쯤으로 하구 만나는 장소는 프라하 식당 어떻습네까. 거긴 요리 값이 상당히 비싼 뎁네다.’
‘요리 값은 상관없는데 무신 일로 만나자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내레 할 얘긴 안 하고 엉뚱한 수작만 하고 있었구만. 기회가 없어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김영삼 선생께서 모스크바에 오신다고 하잖습네까? 이것을 기회로 우리 대사관에서는 남북회담을 한 번 성사시킬라고 하고 있습네다. 그래가지구 평양에다 보고했더니 좋은 생각이다 추진해라. 대신 김영삼 선생하고 만날 우리 대표는 평양에서 직접 파견하갔다. 6월3일까지 보내겠다. 이런 지령을 받았습네다. 기래서 전화를 드렸는데 날짜와 시간 등 이의가 없갔지요.’
‘날짜나 시간 다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평양에서 온다는 특사가 누군지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기건 우리도 모릅네다.’ ‘몰라요? 평양에서 누가 오는지 모른다 말입니까?’ ‘우리도 알라고 기랬는데 평양에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안합네다. 기러니까 기렇게 아시고 6월3일 오후 4시 프라하 식당에서 만납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만나기로 약속했던 6월3일이 6월5일로 연기되고 평양 특사에 대해서도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은 김인철, 김중린 그리고 허담 등으로 혼선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대사관측에 거듭해서 혼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곧 평양측이 김영삼의 대화 상대를 선정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6월2일 김영삼 총재 일행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김상현 부총재를 비롯하여 황병태 정책위의장, 박관용 국회 통일특위위원장 등을 대동하고서였다.
이즈음 3김씨의 움직임에 대한 평가를 보자. “돌이켜 보면 양김씨, 3김씨가 아니고 양김씨 말이여. DJ하고 YS. 이 두 사람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여. 어째서 그런가.”
정계 원로 C옹의 주장은 그렇다. “87년 대선에 이 두 사람이 보기 좋게 패배했는데 패인이 무엇이었나. 국민들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랬으면 말은 바로 해서 국민에게 사과하고 물러났어야 허는디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
사과하고 물러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고 패배한 그 순간부터 다음 번 대통령 선거, 5년 뒤 92년이여. 여기에 대비해서 대선 전략을 짜기 시작한 거여. 그런 거 보면 참 염치불구지. 안면몰수여. 그런디 문제는 우리 국민이여. 그때 이 두 사람 가차없이 땡했어야 옳은디 그러들 않고 오히려 면죄부를 줘버렸어. 언제? 4·26총선 때. 4·26총선 때 이른바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면죄부를 발부헌 것 아니고 뭣이여. 이래 가지고 양김씨가 모처럼 힘 좀 쓰게 됐는디….”
C옹의 진술은 그렇다. 우리 국민들이 너무도 순진하다는 것이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는 대통령이 됐고 김종필 총재는 아직도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최근 박근혜, 정몽준, 이인제의 소위 ‘박·정·이’ 신당론이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의 2002 대선 시계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