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당 합당 뒤 민자당 깃발을 흔들고 있는 YS. | ||
“돌이켜 보면 89년 6월 김영삼 총재의 모스크바 방문은 김 총재로 하여금 합당 결심을 확고부동하게 한 계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데 하나는 국내적인 것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을,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버리고 통일민주당과 자신을 선택했다는 확신이다. 그런 확신은 소련 방문을 전후해서 청와대나 정부 등 6공 정권으로부터 받은 극진한 예우에서 비롯됐다.”
이 진술에 나타나고 있는 김영삼 총재의 판단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노태우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에게 소련을 방문, 정부의 대소 외교를 측면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 요청은 사실상 무시되었고 YS로 하여금 역할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YS의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노태우가 DJ를 버리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판단. 그리하여 가장 초조하게 생각했던 노태우-김대중의 밀약이 중간평가 유보라는 단발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안도감과 함께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황병태 전 의원의 진술이다.
“두 번째는 국외적인 것으로 소련 방문에서 확인한 세계사의 대전환이었다.
특히 김 총재가 당황했던 것은 IMEMO를 방문했을 적에 프리마코프 소장이 한 말이었는데 그는 김 총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아는 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박 대통령을 존경하지 않고 매도하려고만 드느냐.’
이 말이 YS에게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소련이라는 세계 최강국이 경제 정책의 실패로 망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데다 소련 입법부의 수장인 프리마코프 이 사람은 그 직후 IMEMO 소장에서 최고회의 의장으로 영전했다. 이분한테서 한국의 경제 성장을 극찬하고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 진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YS 회고록 〈나의 정치 비망록〉의 기록이다
‘합당을 결심하면서 나는 소련을 방문했을 때에 느낀 감동을 생각했다. 소련 방문 때에 내가 목격한 것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정치적 상황 또한 다를 것은 없다. 변해 가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정치 또한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감동이었다. 소련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변할 줄은 꿈엔들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그런 때에 마침 노태우 대통령 쪽에서 제안이 들어 왔다. 여야가 각기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계개편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에서 소련 방문의 감동이 다시 한 번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89년 6월19일 소련 방문에서 돌아온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비서실로부터 귀국을 환영하는 인사 전화를 받는다.
“예, 나 김영삼입니다.”
“안녕하십네까. 비서실장 홍성철입네다.”
“아이구 홍 실장께서 전화를 다 주시고. 덕분에 소련 여행은 잘 하고 돌아 왔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그렇게 좀 전해 주이소.”
“그렇지 않아도 각하께서 문안 전화를 드리라는 지시가 있으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렇습니까.”
“각하께서는 김 총재께서 모스크바를 방문하시는 동안 혹시라도 무슨 사고가 있을까봐 크게 걱정을 하셨는데 그렇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쁘다는 말씀을 하셨습네다.”
“뭐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튼 걱정해 주셨다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각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네다. 여독이 남아서 피곤하시갔지만 빠른 시간 내에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 실은 그래서 전화를 드렸는데 어떻게 각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갔습네까.”
여기서 진술이다.
좌동영 우형우의 좌동영. 이제는 고인이 된 김동영 의원이다.
“소련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이틀 뒤, 6월21일이다. 김영삼 총재께서 측근 중진들을 상도동으로 불렀다.”
김영삼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에, 내가 오늘 아침부터 이렇게 우리 중진 의원들을 모이라칸 거는 다른 기 아닙니다. 지금이 10시니까 두 시간쯤 남았는데, 12시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노태우 대통령하고 담판을 벌이기로 돼가 있습니다. 담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우니까 돌아와서 밝히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내용입니다. 이거는 내가 이번에 소련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감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도 인자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 지향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달려 있을 기 아니라 지난 일은 깨끗이 청산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 역점을 둘 때가 되었다….”
다시 김동영 전 의원의 진술이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는 심지어 당의 중진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 밝히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정계 개편 3당 합당에 관한 한 김영삼 총재는 좌동영 우형우에게까지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알고 있는 사람은 합당 협상의 통일민주당측 주역 황병태 정책위의장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역사적 고증을 위해 비록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김영삼 총재는 중진 측근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변화를 선언적으로 예고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원로 정치인 C옹의 설명이다.
“90년의 정계개편, 즉 3당 합당 얘길 하고 있는데 돌이켜 보면 이 정계개편이 그때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때까지 합해서 모두 세 번 있었다.
첫 번째가 80년 5·17사태 직후에 새로운 헌정 질서 구축 과정에서 나온 정계개편인데 이때는 정계개편이라기보다 폭력을 동원한 강제개편, 바로 싹쓸이다. 모자라는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구 정치판의 여야 정치인들 중에서 머릿수를 맞춰서 억지 춘향이 식으로 정치판을 새로 짠 것이다. 두 번째는 86년 개헌 논쟁의 와중에서 나왔다. 전두환 정권 파장 머리에 정권 연장의 한 방법으로 내놓은 내각책임제 개헌이 바로 그것인데 그게 어디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나.
거센 국민 저항에 부딪쳐서 무산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직후 이루어진 노태우 김영삼 단독 회담의 의미에 대한 증언이다.
6공 청와대 Y비서관이다.
“6월21일의 독대는 어느 쪽에서 먼저 요청했다기보다 김영삼 총재가 소련 방문길에 오를 적에 이미 약속이 돼 있었다. 보고라면 좀 우습지만 소련 방문의 경과에 대해 한 사람은 얘기하고 한 사람은 듣는 형식으로 마련된 그런 자리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그런 자리로서 마련이 됐지만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정계개편과 합당 문제에 집중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김 총재의 소련 언행, 그 중에서도 특히 평양에서 온 허담과의 회담 내용도 화제가 됐지만 그보다는 역시 합당 문제에 무게가 실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야 할 한 가지 사실은 김영삼 총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청와대에서는 정무수석실이 중심이 돼서 정계개편을 위한 청사진이 마련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계개편 3당 합당을 위한 청사진은 정식 명칭을 ‘정계개편 방안 검토보고서’로 돼 있다. 이 보고서가 정무수석실에서 완성되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은 김 총재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기 직전 무렵, 4개항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첫째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 이 경우 단순한 여소야대 구조는 극복할 수 있으나 신민주공화당의 대국민 이미지에 문제가 있다. 구 여권간의 합당이라는 일반적인 시각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통일민주당과의 합당,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있다. 만일 실현이 된다면 대국민 차원에서 정치적 명분은 있을 수 있다.
셋째 평화민주당과의 합당, 지역감정 해소 차원에서 긍정적이며 바람직하다. 그러나 민주정의당과의 이질적인 괴리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두 당간의 서로 다른 세력의 융합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넷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 실현이 가능하다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상 네 가지 항목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네 번째. 즉 민정당,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에 의한 3당 합당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아직 문제는 있었다. 여권의 정계개편, 합당 작업은 총괄하다시피하고 있는 청와대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이때까지도 보혁구도의 4당 합당, 즉 민정, 민주, 공화의 3당에다 평민당까지 포함하는 4당 대연합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총재와 박철언의 접촉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확인한 바 있다. 동교동 지하실에서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비밀 접촉의 진상이다.
3당 통합의 마지막 단계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양자의 접촉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총재님.”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았습니까.”
“총재님 말씀은 저가 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보기와는 달리 집요하시구만. 그렇다면 더욱 야단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박철언이 집요합니다. 한 번 옳다고 믿는 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해내고야 맙니다.”
“그렇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이번 일은 그래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나가 박 보좌관의 집념에 밀려서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소?”
“그거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적절할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속담에 그런 기 안 있습니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아요?”
“또 서양 속담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기는 자다.”
“이보시오. 박 보좌관.”
“그렇다고 지가 무리하게 자꾸만 총재님을 찾아와서 괴롭히는 일은 안할 겁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측근 중에서 제 뜻을 듣고 총재님에게 전할 수 있는 분을 한 분 지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김대중 총재는 왜 김원기 원내 총무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