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공과 6공은 다르다”는 연설까지 해 DJ를 당황하게 한다. | ||
김영삼 총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회담이 거의 끝나갈 때였어요. 서로 할 얘기를 다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소매를 붙들더니만 이래 말하는 기라.” 홍성철 비서실장이 궁금한 듯 물었다. “누가 말입네까. 허담이가 말입네까?” “그렇지 허담이가.” 최창윤 정무수석도 끼어 들었다. “말씀해 보이소. 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김영삼 총재 선생님, 허담이는 나를 꼭 이렇게 불러요.” “선생님은 그쪽에서는 상당한 존칭입니다.” 박철언 보좌관이 흥을 돋우었다. “그래요?” “저도 그쪽 사람들 접촉할 적에 늘 그런 호칭으로 불렸잖습니까. 박철언 선생, 또는 박철언 특사 선생 이렇게 말이지요.” 가벼운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가만 내가 어데까지 얘기했지요?” “허담이가 소매를 붙들었습네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습네까?” “참 그랬지요.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지요. 김영삼 총재 선생, 우리 둘이서 별도로 얘기 좀 합시다. 그래 순간적으로 내가 잠시 망설였지요. 응낙해야 하나 아니만 거절해야 하나.
그러다가 아니다 이거는 거절하는 기 옳다. 이래 생각하고 단호하게 그러나 좋은 말로 말했지요.” “어떻게 말입네까?” “지금까지 우리가 두 시간이 넘게 얘길 했습니다. 그만 하면 피차 충분히 얘기했으니까 할 얘기가 있으면 다음에 만나서 하지요. 이랬더니만 그때 허담이의 표정이 재미있었어요. 무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그런 표정이었어요.” “자 그만 일어나시지요.” 그때까지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노태우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됐으니 두 사람만의 회담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이었다. “그러지요. 그라고 보니 나만 혼자 떠들어댄 기 아닌가 모르겠네.” 이날 노태우 김영삼 회동에서는 마침내 합당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89년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전 의원의 진술을 통해 확인해 보자. “노태우 대통령은 이미 우리가 예측했던 대로 양당간의 정책연합이나 아니면 연립정부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김영삼 총재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그런 형태로는 안된다 이런 얘기였다. 어째서 안되느냐. 김 총재는 그때 지난 1960년 민주당 정권이 시도했던 연립 정부 실패를 예로 들었다.” 다시 노태우 김영삼 회동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아시는지 모르지만 4•19 직후에 자유당이 붕괴하면서 우리 민주당에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래가지고 민주당 정부가 수립됐는데….” 김영삼 총재의 다소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노태우 대통령이 웃으면서 거들었다. “나는 그때 육군 중위였습니다.” “그랬습니까? 그러만 아시겠구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우쨌든 그래가지고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는데 복에 겨워 그랬는지 당이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신파와 구파지요. 그래가 양파 간에 정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 시작됐는데 이래서는 안된다,
양파가 연정으로 나간다는 데 합의가 됐습니다.” “합의는 됐지만 얼마 못 가 깨졌습니다.” 노태우 대통령도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어째서 깨졌는지 알고 있습니까?” “연립정부를 했기 때문에 깨진 거 아닙니까?” “나가 연립정부를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그깁니다. 할라면 확실하게 해야지요. 때가 어느 때고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정책연합이나 연립정부 같은 불확실한 형태로 해서 성공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노태우 대통령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야단이구만, 그러만 어떻게 한다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연정이나 정책연합 외에는 생각을 안했습니다.” “방법은 걱정 마이소.” 여기서 김영삼 총재의 특유의 밀어붙이기 수법이 나온다. “노 대통령.” 김영삼 총재는 각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당신이 시방 무엇보다도 필요한 거는 이 김영삼이의 도움입니다. 나는 당신을 도와줄 깁니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때 김영삼 총재가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5공 청산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공 청산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되질 않습니다.
국민에 대해 명분이 서질 않아요. 따라서 당신이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는 5공 청산입니다.” 그러나 5공 청산은 양당 합당을 위한 하나의 전제일 뿐 필수 조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심은 역시 양당 합당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영삼 총재는 이날의 청와대 회담과 관련해서 측근들에게 회고한 바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두만. 여소야대 정국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정치 안정을 위해서는 정책적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연립정부로 가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 나가 대통령에게 요구한 기라. 4당 체제가 문제가 많다는 거는 내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5공 청산부터 처리해야 한다.’ 김영삼 총재의 합당 카드는 여기서 던져졌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요구를 했다. “만일 당신이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민정당 간판을 내리시오. 그러만 우리도 통일민주당 간판을 내릴 깁니다. 그래가 합당을 해서 당신을 도와줄 깁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정책연합 수준의 통합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 총재의 치고 나오기에 허를 찔렸던 것이다.
▲ 지난 80년 군에서 전역하며 사열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 ||
김영삼 총재의 관훈클럽 토론이 있던 날 권노갑 전 의원이 동교동을 방문했다. “아, 권 의원. 어서 오시오.” 김대중 총재가 평생 동지 권노갑 전 의원을 반가이 맞았다. “선생님. 지금 막 김원기 원내총무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 총무가 무슨 일로?” “오늘 밤 김영삼 총재가 관훈클럽에서 연설을 하지 않습니까?” “참, 그게 오늘이었던가?” “그래가지고 조금 아까 연설이 시작됐는데 김 총무의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내용이 좀 이상스럽습니다.” “김 총무가 관훈클럽 토론에 참석하고 있는가.” “김 총재의 연설을 들어 볼라고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런데 연설 내용이 심상칠 않은 거 같습니다.” 김대중 총재의 미간에 주름이 생긴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닌가. 내용이 어떻게 심상칠 않아?” 권노갑 전 의원이 메모지를 펼치며 읽었다. “제가 김 총무의 전화를 메모했는데,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노태우 정권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탄생한 정당한 정권이다.
군사 정권이 아닐 뿐 아니라 독재 정권은 더더욱 아니다. 전두환의 5공 정권하고는 탄생 자체가 다른 만큼 마땅히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한다. 요런 내용이구만요.” “김영삼 총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기는요. 이렇게 말을 했다는데요.” “김 총재가 누구여.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다고 해도…. 아니여. 그럴 것이 아니라 권 의원, 나가서 김 총무하고 연락을 해가지고 배경을 한 번 확인해 보소. 김영삼 총재가 그런 말을 했다면 거기엔 필시 뭔가 배경이 있을 것이여. 그걸 확인해보라 그 말이여.” 당시 상황에 밝은 6공 청와대 Y비서관의 진술이다. 이 진술은 상당히 중요하다. 정국 상황 즉 3당 합당을 위한 물밑 교섭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 따라서 상대적으로 평민당의 소외감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 등을 알게 하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밝힌 대로 그 전해 그러니까 88년 가을 노태우 대통령과 세 야당 총재들의 연쇄 단독회담에서 역할 분담이 있었다.
초당적인 외교 차원에서 김대중 총재는 소련을, 김영삼 총재는 중국을 그리고 김종필 총재는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의 합의 사항으로 하나의 약속이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이 약속을 어겼다. 김대중 총재 대신 김영삼 총재에게 소련을 방문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은 청와대나 정부쪽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그야말로 빛나는 성과를 올린 데 반해 그해 초에 있었던 김대중 총재의 헝가리 방문은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어 제1야당 총재의 나들이치고는 여간 초라하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느냐….” Y비서관의 증언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