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전 대통령 | ||
지금은 ‘병풍’ ‘신북풍’ 등의 태풍들이 쉴새 없이 정국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지적인 태풍들은 이번 11월 본격적으로 몰아닥칠 메가톤급의 폭풍에 비하면 그 세력들이 미미하다. 그만큼 지금이 ‘폭풍전야’라는 사실을 의미한다.이회창 후보의 집권은 이념적으로는 보수 회귀를 의미한다. 노무현 후보의 집권은 기본적으로 진보 세력에 힘이 실릴 것이다.정몽준 후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재계 판도의 변화 등 대대적인 지각변동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 이후 각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우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엇갈린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격동 50년 폭풍전야에서는 이들 두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 평가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영남권과 TK지역 유권자들의 표심과 직결된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지난 1997년 12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의 사면 복권 조치로 2년여의 교도소 생활에서 풀려난 두 전직 대통령은 개선장군이었다. 특히 전두환 전직 대통령, 그의 언행은 스스로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이자 현세의 영웅이었다.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밝힌 전두환 대통령의 짧은 대국민성명엔 곳곳에 김영삼 정부에 대한 비난과 야유 그리고 가시가 돋쳐 있었다.
‘최근 뜻하지 아니한 경제 대란을 맞이하여 우리 국민 여러분들께서 얼마나 놀라고 불안하며 내일에 대한 걱정 속에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 상황을 정부에서는 갑작스런 위기 국면이라, 이리케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기 국면을 맞이하여 관록있고 믿음직한 정치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 대해 본인은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대통령 당선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다른 거는 다 놔두고 우선적으로 파탄 지경에 이른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전력해 달라 하는 것이고, 아울러 정치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여야를 막론하고 화합해서 최선을 다해 경제를 살리는 데 전력 투구해 달라 하는 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지금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 국민과 기업과 정부가 일심동체가 돼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중심으로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다 하는 거를 말씀드리면서 본인도 미력하나마 일조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한 전두환 전직 대통령은 그렇게 말했다. ‘국가적 위기 국면을 맞이하여 관록있고 믿음직한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축하한다.’반면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한 또 한 사람의 전직대통령 노태우씨는 어땠는가.
‘먼저 이 추운 날씨에 이 사람 때문에 고생하는 기자 여러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국민 여러분께 그동안 많은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짧은 인사말을 통해 드러난 두 대통령의 스타일의 차이였다. 앞에서 정계개편 3당 합당의 과정을 살펴본 88년 말에서 89년에 이르는 기간, 정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청문회 출석 문제를 에워싸고 숨가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의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고 있는 국회 특별위원회는 5공비리특위와 광주특위였다.
이중 5공비리특위는 11월30일과 12월12일 두 차례에 걸쳐 증인 출석을 요구하는 서한을 띄웠으나 전 전 대통령은 아무 통보 없이 출석하지 않았다. 89년 3월10일 동 위원회는 동행명령장을 발부했다. 3월13일 오전 10시까지 일해재단 설립 배경 및 정치자금 조성 관련 비리조사 청문회에 동행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측은 여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석을 거절하고 5공특위 이기택 위원장에게 회신을 보냈다.동행명령장을 접수한 그날의 회신이다. ‘본인은 89년 3월13일에 개최되는 귀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 증언할 것을 요구하는 귀하의 동행 명령장을 수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부득이 출석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귀하와 귀 위원회 위원들의 양해 있으시기 바랍니다.’한편 광주특위 즉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88년 11월10일 동 위원회는 1차 출석 요구서를 보낸 데 이어 12월10일과 23일 그리고 해가 바뀌어 89년 1월12일과 20일 등 4번에 걸쳐 전 전 대통령의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으나, 전 전 대통령측은 88년 12월17일 등 3번에 걸친 답신에서 특위 활동에 가능한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나 헌정사의 관례나 국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합리적인 방법의 모색을 위해 특별위원회와의 협상을 제의하고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89년 1월12일 5·18광주 특위는 전 전 대통령측의 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는 동행 명령장과 함께 서한을 발송했다.
‘보내주신 귀하의 서한은 잘 받았으나 귀하의 뜻은 이미 지난번 서한에서 숙지한 바 있었습니다. 본 광주특위에서는 국민들의 요청에 따라 귀하가 본 위원회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출석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귀 증인은 국민의 이름으로 발부하는 증언 요청에 응하셔서 5·18광주특위 청문회 증언대에서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증언할 것을 거듭 요청하는 바입니다.’이에 대하여 연희동 전 전 대통령측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89년 2월22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약칭 광주특위가 발부한 동행 명령장에 대한 전 전 대통령측의 같은 날짜 답신의 내용이다. ‘본인은 수차에 걸쳐 귀 위원회에 보낸 답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난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태와 그 과정에서 야기되었던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참으로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로 인한 한과 응어리를 하루 빨리 아물게 하여 국민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능한 모든 노력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그 어떠한 행동도 그것이 새로운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거나 아니면 불신과 증오의 골을 깊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귀 위원회가 본인에게 요구하고 있는 협력의 방법 또한 원내 각 정파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귀 광주특위가 이와 같은 원칙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구실로 청문회 참석을 거절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이러한 전두환 전 대통령측의 답신에 대해 특위의 반응은 어떠했나.황명수 특위 연석회의 공동의장과 신기하 평민당측 간사간의 대화 내용을 보자.“이런 빌어먹을. 혹시 이거 짜고 하는 것 아니요?”황명수 의원의 불만이다.“짜고 하다뇨? 뭘 짜고 한단 말입니까?”고 신기하 의원이 궁금한 듯 물었다. “모르겠거든 전두환이 보낸 답신 내용을 잘 좀 분석해 봐요. 말은 오리 궁둥이처럼 돌려댔지만 원내 각 정파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결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청문회에 나와 증언할 수 있겠다, 이건 결국 수작 아니요?”
“여야가 합의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 나오지 않는 한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을 못하겠다, 이 말이구만.”“민정당은 당론에 따라서 간사회의에조차 참석을 안했어요. 그런데 우리 야 3당이 무슨 수로 여당과 합의를 하겠소.”당시 5공 청산에 대한 각 당의 입장은 어떠했나. 5공 청산의 연내 종결 원칙은 여소 야대 국회에서 여야 4당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먼저 노태우 대통령의 국회 연설 내용이다.
‘5공 문제는 그동안 국회 특위의 노력으로 대부분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본다. 따라서 정부는 공정한 수사를 통해 엄정하게 사법처리함으로써 매듭을 지을 것이다. 다만 혹시라도 미진한 것이 남아 있다면 수사를 계속하여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처리할 것이지만 여기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5공 문제는 여야 합의하에 연내에 완전무결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대하여 야 3당 총재들의 생각은 어떠했나.먼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5공 청산 문제를 연내에 매듭을 짓자는 노태우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정부 여당이 이 문제 해결에 성실하지 못할 때에는 태우 정권의 옳지 않음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중간평가와 국민투표의 방향으로 밀고 나가면서 단호하게 싸울 것이다.’김영삼 민주당 총재.‘5공 청산을 마무리 하기 위해 우리 민주당은 야 3당 총무간의 합의 사항을 존중할 것이다. 그래가지고 야권 공조 및 단일화 마련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의회 내에서의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5공 청산을 연내에 마무리 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공화당 김종필 총재.
‘5공 청산 문제는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야가 다같이 좌고우면하지 말고 구국적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야 3 재들이 합의한 대로 조속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5공 청산을 연내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데는 합의가 돼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89년 초 정국은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바야흐로 우리의 정국은 커다란 분기점에 서 있다. 민주화와 국민 화합을 이룩하는 가운데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기여하는 발전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 극좌와 극우가 판을 치는 가운데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과 갈등만이 팽배하는 퇴보의 길을 택할 것인가?’그해 89년 3월호 한 월간지에 게재된 어느 정치학과 교수의 직언이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임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 일반 서민들의 발목을 잡고 오히려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무더위를 몰아내는 서늘한 바람은 한차례의 폭풍이 되어 과연 누구의 깃발을 펄럭이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