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세동(왼쪽)과 정호용(오른쪽) | ||
당시 남산에서 조사를 받은 K씨의 기억이다.
“80년 5월 남산 지하실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남산 지하실은 그때가 세 번째였는데 그런 식으로 가혹하게 당하기는 그때가 처음이다. 살아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재미있었던 일은 저녁 식사에 소시지 등 메뉴가 푸짐하면 다음 날은 반드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저녁상에 소시지가 올라오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7월14일 남산에서 검찰에 송치돼서 구치소로 이감이 됐는데 어찌나 기뻤던지 마지막 식사로 설렁탕을 먹으면서 설렁탕 국물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80년 5·17사태에 동교동계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가. K씨의 진술에 이어 현 민주당의 S의원.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저격수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5월17일에 일단 체포되지 않고 모면했는데 한 달 뒤인 6월18일 은신처인 반포의 친구 아파트에서 체포됐다. 그 자리에서 권총을 들이대며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가했다.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자, 온 몸을 묶고 팔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매단 뒤 천장을 향한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거듭된 고문으로 몸이 어찌나 망가졌던지 치안본부 특수대에서조차 신병 인수를 거절할 정도였다.” 모두가 그랬다.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이신범 조성우 이해동 등등. 특히 작가 이호철의 경우는 가혹한 고문 끝에 정신 이상 상태에 빠져 버렸다. 고문을 가하러 들어오는 수사관을 엄마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대중 본인은 어떠했는가.
“한줄기 햇빛조차 비치지 않는 지하 취조실에서 하루 18시간씩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신체적으로 고문은 안 받았다. 위협은 수없이 당했다. 옷을 발가벗기고 고문을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잡혀간 지 50일쯤 되는 어느날 계엄사 합동 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이 찾아 왔다.” 이학봉 중령은 짧게 말했다.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소. 죽는다는데 두렵지도 않아요.” “나는 죽음과의 대면을 수없이 되풀이해 온 사람이오.” “아 그래서 이래 초연하구만. 그래도 아직은 죽고 싶은 생각은 없을낀데. 죽어버리면 대통령의 꿈이고 뭐고 다 일장 춘몽 아니요.”
“아직도 할 말이 남았소.” “아니오. 내일 모레 다시 오겠소. 그때까지 아까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 계속되는 김대중 본인의 회상이다. “이학봉 중령은 그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죽는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버려라. 그리고 우리한테 협력을 해라. 그게 바로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날 밤 정보부 직원 한 사람이 지난 50일 동안 보지 못했던 신문을 넣어주었다. 신문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됐다.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다는 것과 내가 엄청난 누명을 쓰고 있고 이미 신군부에 의해 공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뜬 눈으로 묵상을 했다. 내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의 석방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다가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했다. 내가 사는 길은 그들을 위해 죽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결심을 했다.
이틀 뒤 이학봉이가 다시 찾아 왔다.” 지하 취조실 문을 열고 들어 온 이학봉 중령이 말했다. “아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구만. 그런데 불과 이틀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것 같은데….” 김대중은 애써 위엄을 갖추고 물었다. “나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이 중령.” “알고 싶은 기 있으면 물어 보소.” “당신은 나한테 대통령의 꿈을 버리라고 했소.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될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 같은데, 대체 그게 누구요?” “아니 그러면 아직도 그 분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요?” “모르겠소.” “이거 야단났구만. 세상 사람이 다 몰라도 김대중 선생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몰라요?”
여기서 흥미 있는 진술을 들어 보자.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강창성 의원이다. “내가 전두환 사령관을 만난 것은 80년 3월4일이다. 내가 보기엔 그때 이미 그는 대통령을 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5·17사태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니까 그 시점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다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
“이 중령, 당신이 시방 나를 찾아온 거는 나가 어떤 결심을 했느냐. 다시 말해서 대통령의 꿈을 버려라. 그리고 당신들한테 협력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이냐 이것을 알고 싶어서 온 거지요?”
“거절은 못할 겁니다. 거절하면 곧바로 죽음인데 그럴 수 있겠소?”
이학봉 중령은 흰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얼굴엔 비장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가서 전하시오. 나 김대중이는 당신들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심했소.” 5·17사태에 전두환과 김대중의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다. 그러나 이학봉 중령을 통한 두 사람의 간접 대면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과연 결과는 어떤가.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과 마찬가지로 총탄에 희생당했고,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스스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YS 김영삼은 아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들었고 DJ 김대중 또한 급기야 두 아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말았다. 이미 지난 사람은 오히려 낫다. 올 대선도 이제 60여 일 앞으로 다가 왔다. 날이 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물어뜯기 강도가 더해가고 있다.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문제는 결국 한인옥씨의 소환 얘기까지 나오고 있고, 청와대는 현대상선의 4억불 지원설과 관련하여 계좌추적까지 해 보자는 주장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다시 한국 현대 정치사의 최대의 정계개편인 3당 합당으로 돌아가자. 89년 정국 최대의 현안인 5공 비리 청산, 즉 전두환 전임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관련하여 여야간의 줄다리기. 그해 1월24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야 3당 총재는 5공 비리 청산과 관련해서 3당간의 합의를 도출했다. 먼저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
“노태우 정권은 지금의 우리 정국을 한마디로 난국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반대다. 지금의 정국을 난국으로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도대체 정국 현안의 문제가 뭔가. 5공 비리 청산이다. 이것을 하면 되는데 안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 놓고 난국이다 난국이다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모든 것은 노태우 대 통령 하기에 달렸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내가 들으니까 민정당에서 이런 얘길 한다는데, 야권 3당이 여소야대 정국을 이용해서 지나치게 과거사에 얽매일라고 한다, 일이 산적해 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5공 비리 청산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냐….
그래서 내가 우리 원내총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거 말 한번 잘 했다. 내가 일이 산적해 있는데 언제까지 5공 청산을 미루고만 있을 것인지 가서 좀 물어보고 오라.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씨는 반드시 국회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을 해야 한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
“전두환 전임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하고, 5공 핵심 여섯 사람을 사법 처리해야 한다 하는 데 대해서 우리 야 3당 총재가 합의를 봤다.
그러니까 그 문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자리를 빌어 평소 나의 소신 한가지를 말씀드리겠다. 애당초 5공 비리가 왜 발생했느냐. 내각책임제를 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따라서 내각책임제를 서둘러 실시해야 한다.” 당시 청와대 최창윤 정무수석은 야 3당의 이러한 움직임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야권에서는 5공 청산 문제를 두가지 사안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두환 전임의 5공특위 청문회 출석이고, 다른 하나는 5공 핵심 6인에 대한 사법처리 건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섯 사람이 누구야?” “장세동 안무혁 두 전 안기부장,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이원조 의원, 허문도 전 통일원장관, 정호용 전 특전사 사령관입니다.” “뭐이 정호용 의원!”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정호용 의원은 5공 핵심에 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안되겠구만. 정무수석. 원내총무 연락해서 급히 들어 오라카소.” 1월24일 야 3당 총재 회동에서 합의된 5공 비리 청산 부분은 두 가지 항목으로 돼 있다. 하나는 이미 앞에서 밝힌대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특위 및 광주 특위 청문회 증언 출석. 그리고 다른 하나는 5공 핵심 식스 멤버에 대한 사법처리 부분이다.
첫 번째 항목은 그렇다치고 두 번째 부분의 여섯 명 즉 식스 멤버는 어떻게 해서 5공 핵심으로 분류되었는가. S대령이 밝힌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5공 비리의 대명사격인 일해재단 기금 조성 비리를 비롯해서 청남대 관련 의혹,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 신개축 및 주변 공원화 관련 비리, 전국의 시장, 도지사 공관 내 대통령 전용 시설 관련 비리 등과 연관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장 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 팔이었던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5공 핵심으로 본인도 불만은 없었다. 다만 각종 비리와 관련해서 사안에 따라서는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예컨대 청남대 비리와 관련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반박이다.
“청남대 내가 했다. 청남대 자체 건물에 60억 정도 들어가고 도로 닦고 주변 정리하고 이래저래 한 1백억 들었을 거다. 그렇게 해서 번듯한 대통령 별장 하나 지어놨더니 이걸 가지고 5공 비리 운운하는데 참 한심한 일이다. 그게 어디 전두환 대통령께서 혼자 쓰자고 세운 건가? 아니면 청남대가 장세동이 소윤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그렇다 치고 식스 멤버 중 가장 문제가 된 사람은 5·18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호용 의원이었다.
어째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