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4년 11월16일 박정희 전 대통령 15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두 사람의 모습. | ||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회창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 항간에서는 그래도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이 있는데 이처럼 무력하게 당하고 말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정치적 수완이 한 번쯤은 발휘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대로 힘없이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마치 ‘폭풍전야’라는 느낌이 든다.
한국의 현대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이승만 정권 이후 후계 대통령들은 전임자를 뛰어 넘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만의 추세도 아니거니와 오늘날의 현상만도 아닌 듯하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고 후계자는 전임자를 극복해야 자신의 터전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문화인류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발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 문제로 고심을 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극복해야 했다. 노태우 대통령 또한 5공의 공포정치를 비난했고, 김영삼 문민정부는 노태우 6공 정권까지를 군사독재로 규정했다.
김대중 정부는 문민정부 태동을 완전한 정권 이양으로 보지 않고 국민의정부야말로 반세기만의 첫 여야간 정권교체로 구분을 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차별화 정책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 중에서 만약 대통령이 나온다면 김대중 국민의정부는 또 어떻게 단죄될 것인가.
이번 겨울은 무척 빨리 다가왔다. 오는 12월19일의 대통령 선거라는 폭풍이 몰고 올 추위를 마치 예고라도 하는 것 같다. 유배지가 된 백담사 88년의 겨울도 무척 추웠다. 특히 백담사의 전두환 이순자씨 부부에게는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최세창 합참의장이 백담사를 방문하려다가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제지를 당한 사실을 안 전두환 전 대통령은 추위에 떨었다기보다는 차라리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 몸서리를 친 것이다.
갈수록 깊어지는 6공 청와대와 백담사의 갈등, S대령의 진술이다. “최세창 합참의장이 백담사를 방문했다가 청와대 경호실과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로 자그마치 4시간이나 실랑이를 계속하다가 돌아간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절치부심하고 있는 전 전 대통령을 격분케 하는 또 하나의 자극제였다. 특히 이 사건이 백담사의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만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6공 청와대가 백담사를 고립무원의 유배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옛 부하들조차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분통을 터뜨리며 내뱉은 말이다. ‘야! 노태우 어데 말 좀 해 봐라! 내가 여그서 역적 모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옛 부하들조차 못 만나게 한다는 기 무신 짓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니가 내한테 이래도 되나 말이야. 이 나쁜… 으흐흐.’ 다시 S대령의 진술. “그런데다가 더욱 전 전 대통령의 심기를 자극한 것은 보안사가 백담사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점이었다.
백담사를 방문하기 전날 최세창 장군은 백담사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최세창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도 못하고 참말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정은 각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 말씀 안 드리겠고 내일은 꼭 찾아뵙고 사과도 드리고 문안도 올리고 하겠습니다. 너그럽게 봐 주이소.’
그리고 다음날 백담사를 방문했는데 청와대 경호실과 보안사 요원들의 제지를 받아 사과는커녕 문안도 못 드리고 되돌아간 것이다.” 최세창 장군이 돌아가고 나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전 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각하, 확실한 것은 모르겠으나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순자씨가 끼어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안 실장.” “지금 이곳에 백담사 경비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과장급이 나와서 지휘하고 있지만 실제 병력은 강원도 경찰에서 차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세창 장군이 찾아 온 날은 예외로 경호실과 보안사 아이들이 나와 있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 전씨 부부가 머물렀던 백담사의 방 내부 | ||
“그렇다고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안현태 전 실장이 의아한 듯 이순자씨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백담사에 들어와서 며칠도 안됐을 때였어요. 인제에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그리고 뭐라는지 알아요. 오늘밤 자정부터 이 전화에 도청장치가 설치된다. 조심하라.”
어찌 보면 당시만 해도 도청은 상식이었다. 지금 야당 일부에서 국정원의 도청과 감청에 대해 정부를 비난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사람들이 여권에 있을 때는 더 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노태우 정권은 철저하게 이전 정권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태생적 한계’라고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89년 3월 정국은 정부 여당의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양분되었다. 중간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정면 대립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김용갑 총무처장관, 홍성철 비서실장, 최창윤 정무수석, 박세직 안기부장이 모였다. 김용갑 장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칫하다가는 정국이 홀랑 뒤집혀 버릴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인데 이거를 누가 지시했는지 한계도 모르고 어떻게 일을 진행합니까?” 모인 사람들은 헛기침만 하고 있다.
“헛기침들 그만하고 누가 말 좀 해 보소. 정호용 의원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킨다 카는 거를 노태우 대통령도 알고 있지요. 알고 있다면 그분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 아닙니까.” 홍성철 비서실장이 이북 사투리로 대꾸했다.
“이보시오, 김 장관. 기리니까 말해 보나마나 우리가 시방 꼭 기런 걸 따져야 하갔습네까.” 최창윤 정무수석.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기 무신 말이야.” “김 장관이나 우리나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김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우리 모두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들입니다. 그런데….”
“오라 그러니까 대통령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박세직 안기부장이 거들었다. “그런데 꼭 대통령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거를 따질 이유가 있겠소.” 참모들의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의중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종찬 당시 정무장관의 진술이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뒤의 일이었으니까 아마 88년 11월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집무실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연락을 받고 내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그해 4월 4•26총선 때 하마터면 민정당 공천에 탈락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래 가지고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갔다가 자구 노력으로 되살아난 일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급히 상의할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이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의문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 12월8일, 12•5개각에 이은 12•8당직개편 때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한 것이다.” 노태우의 의중은 무엇일까 노태우 대통령은 그로부터 한 달 전인 그해 11월 초 이종찬 정무장관을 불렀다.
“아, 이 장관,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십니다. 앉으소.” “예.” “바쁘신 분이니까 곧바로 용건으로 들어갑시다.”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내가 보기엔 우리 민정당에서는 가장 바쁜 사람 중의 한 사람 같은데.” “한때는 그런 때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제는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아픈 곳을 찌르는구만. 아무튼 그때의 일은 그때의 일이고 오늘은 내가 이 장관하고 상의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불렀어요.” 이종찬 정무장관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각하께서 이 사람하고 상의할 일이 있습니까. 어떤 일입니까.” 노태우 대통령이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이 장관이 알다시피 올림픽이 끝나자 야 3당은 총공세를 취하고 나왔습니다. 5공 청산과 관련해서 전임 대통령의 친인척 문제 그리고 전임의 청문회 출석문제 등이 다 그긴데 여기에 곁들여서 야 3당은 중간평가를 받을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얘긴데 이 중간평가를 받아야 하겠십니까, 안 받아야 하겠십니까. 이 장관의 의견은 어느 쪽입니까.” 이종찬 정무장관의 회상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건의했다. ‘각하,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꼭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정권을 걸고 중간평가를 받아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랬더니 노 대통령이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12•8당직개편 때 나를 사무총장으로 중용하는 예상 밖의 인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끝내 중간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 진영에서는 세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박태준 전 총리, 박근혜 대표 영입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고, 노무현 후보는 탈당파를 붙잡고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6•29선언이라는 획기적인 발표로 기반을 잡고 시종 유리한 분위기였으나 중간평가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진영이 그러한 형국이다. 이대로 시간만 지나면 당선될 것으로 낙관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지지율을 4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묘안을 짜내야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확실한 공약이냐 정계개편이냐, 후보들의 선택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