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사법처리하지 않기로 한 전두환-노태우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사진은 김대중 대통령취임식장에서 서로를 외면한 두 사람. | ||
전 전 대통령이 6공 청와대가 요구하는 백담사행을 받아들여 결심을 굳히게 되는 11월15일 밤의 전화 통화가 문제였다.” 여기서 말하는 11월15일은 88년 11월15일. 즉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기 8일 전, 11월15일 밤에 있었던 두 사람간의 전화 통화를 가리킨다. “이 전화 통화에서 전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친인척들에 대한 더 이상의 사법처리는 없다는 보장과 함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 또한 사법처리는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인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간의 전화 통화 내용을 알아보자. “그러만 우리 친인척들에 대한 사법 처리는 더 이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라 그 말입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모처럼 경어를 썼다. “말씀드렸지만 기환이 형님이나 우환이 순환이 그라고 이창석이 등에 대한 사법 처리는 우리 검찰에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래가지고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집행을 했십니다. 그러나 그 밖의 친인척들에 대해서는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사라진 백담사행의 대가 후임자에 의한 단죄의 전통은 전두환 대통령 이후 두드러진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간의 전화 통화 내용 중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어쨌든 노태우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에 나서기 직전인 11월2일 역시 전화 통화에서 전 전 대통령에게 같은 내용의 약속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11월14일 전 전 대통령이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처남 이창석이 검찰에 연행된 데 이어 22일 하늘처럼 여기는 집안의 어른, 형님 전기환이 구속된 것이다. 이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당부를 했다.
“우쨌든 우리 친인척들에 대해 그리케만 해준다면 고맙겠고 그라고 기왕에 부탁을 하는 바엔 내 한 가지만 더 당부 하겠십니다.” “지한테 부탁할 일이 또 있습니까?” “5공 청산과 관련해서 모든 책임은 내한테 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백담사로 가기로 결정한 거니까 책임은 다 내한테로 미루고 그 외의 측근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십니다. 이기 바로 마지막 부탁이자 내가 당부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각하께서 백담사로 가시는데 그 정도의 약속이야 못하겠십니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일단 약속하겠십니다.” 일단 약속하겠다. 과연 이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이날 밤 두 사람의 전화 통화는 밤 11시부터 약 30분간에 걸쳐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30분 동안 노 대통령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해명하고 사과했고, 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노 대통령의 해명과 사과에 5공과 6공이 공멸할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6공 청와대가 요구하는 백담사행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약속은 지켜지질 않았다. 89년 1월12일 이학봉 민정수석을 구속한 검찰은 잇달아 27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대한 사법처리를 강행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오랜 친구의 부탁을 저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정치 세계에서 약속이란 어쩌면 깨져버리기 위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와의 신의도 저버릴 수 있는 것이 정치다. 아니 저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까.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간의 단일화가 매듭을 짓게 된다고 양측이 밝혔다. 방법과 기준을 놓고 일단 약속을 했다. 그러나 솔직히 국민들은 아직도 이 약속이 지켜질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후보를 위해 정몽준 선거대책본부장이 과연 얼마나 성실하게 임해줄 것인가,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동교동과 전두환의 만남 어쨌든 결과야 어찌 됐건 최후에 대통령으로 뽑힌 사람이 얻게 될 지지율은 적어도 40%는 넘을 전망이다. 최근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기권표를 제외하면 전 국민이 만장일치로 연임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지지도 또한 이에 못지 않는다.
우리 대통령 중에서도 높은 지지율을 보인 대통령이 있다. 간접투표 방식이긴 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통일주체국민회의 지지율은 공산국가의 그것에 비견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여기서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 사령관의 만남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80년 2월 전두환과 동교동의 만남을 먼저 제의한 것은 신군부쪽이다. 신민당 동교동계 핵심이었던 이용희 의원과의 접촉에서 신군부측 합수부 수사 1국장 이학봉 중령은 이렇게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 전•노 대통령의 신의가 깨진 결정적 원인이 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 | ||
그 시점에서 전두환은 왜 동교동과의 회동을 원했을까. 또 동교동은 무엇 때문에 전두환 사령관과의 회동을 좋은 일, 즉 바람직한 일로 판단했을까. S대령의 진술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두 사람이 만나서 통성명이나 하자는 것이 아닌 이상 전두환 사령관은 전두환 사령관대로 김대중 총재는 김대중 총재대로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만나야 할 필요가 문제가 되는데 먼저 전두환 사령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해 80년 1월 하순, 유정회 최영희 의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본부장을 방문해서 태평로에 있는 보안사 안가에서 전 사령관을 만난 적이 있다.” 최영희 의장의 기억이다. “답답해서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국회에서는 헌법특위에서 개헌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국의 앞날은 그야말로 안개 속이었다. 그래서 전 사령관을 만나서 좀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찾아갔다.”
다시 S대령의 진술. “최영희 의장은 60년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예비역 3성 장군으로 전두환 합수본부장하고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2군사령관 시절 전 합수본부장의 장인인 이규동 3형제가 모두 최 사령관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이규동은 관리 참모부장, 이규성은 수송과장, 그리고 이규광은 헌병 부장이었다. 그런데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전 합수본부장과 이순자씨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것이다. 물론 주례만 섰을 뿐이며 워낙 계급의 차이가 커서 사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최 의장의 기억. “내가 그때 전 사령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장군, 계엄 당국이 시국을 지금처럼 끌고 나가서는 안된다. 하루 빨리 가닥을 잡아서 수습을 해야 하는데 유일한 대안은 JP뿐이다.” 전두환 사령관이 물었다. “JP라면 김종필이 말입니까?” “공화당의 김종필 총잽니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가지고 되겠습니까?” “공화당의 기반이 살아 있으니까 행정부에서 밀고 군부에서 도와주면 야권의 세력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 사령관이 나서서 JP를 밀어 주시오,” 전두환 사령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최 선배께서 내 말을 잘 몬알아 들으신 거 같은데 그거는 최 선배의 생각이고 국민들은 그렇질 않십니다. 국민들은 JP를 그런 인물로 평가하고 있질 않아요. 그보다는 오히려 부패 또는 비리의 흠집이 많은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밀어줄 수 있겠십니까?”
시국을 수습할 대안은… “그렇다면 군의 선택은 뭐요. 김영삼이나 김대중이요?” “김영삼이도 안되고 김대중이는 더더구나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군의 선택은 둘 중 하나가 아니겠소. 3김씨가 아닌 누군가를 찾아내서 옹립하든가 아니면 직접 나서든가. 전 장군이 직접 나설 생각이오?” 조금 전까지도 단호한 표정이었던 전두환 사령관이 겸연쩍게 말했다. “선배님, 실은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십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여러 가지로 생각중입니다.”
최영희 의장은 순간적으로 눈치를 챘다. ‘아, 이 친구가 직접 나설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군.’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 의장이 말했다. “쓸데없는 얘길 늘어놔서 미안하오. 이만 가겠소.” “아, 저 선배님, 선배님….” 전두환 사령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최 의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같은 내용의 또 다른 진술이 있다.
보안사령관 출신 강창성 의원이다. “80년 3월인가 해운항만청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땐데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강 선배하고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좀 들러 달라 이렇게 부탁하길래 찾아갔다.” 삼청 교육까지 받게 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에게 과연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