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전 참전 당시의 전두환 | ||
이 땅의 유권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람 안 보고 일단 1번만 찍는 부류와 반대로 무조건 2번만 찍는 부류이다. 지난 97년 대선까지는 1백% 기호 1번이 당선됐다. 2번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이다. 그만큼 2번을 찍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일까. 그러나 이번 2002년 대선에는 여권 후보가 2번이고 야권 후보가 1번이다. 유권자들이 이러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어낸 데 대해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너무나 다른 사람 둘이 정치적 목적으로 합쳤다고 비난하고 있으나, 노무현 후보는 ‘정치도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상당히 고무돼 있다. 두 후보간의 단일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은 과연 어느 한 쪽이 순순히 승복할 것인가였다. 이인제 의원의 사례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서명이 있다. 지난 80년 ‘서울의 봄’을 앞두고 전두환 사령관은 김대중 총재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물론 전두환 사령관이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보안사 이학봉 중령이 악역을 맡았다.
김대중 당시 총재의 회상이다. 이학봉 중령을 꾸짖는 김 총재. “당신들은 오늘 나한테 몇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는 전두환 사령관과의 회동을 약속했는데 전 사령관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 김대중이를 우롱한 것이다.” 이학봉 중령은 꼿꼿한 자세로 반박을 했다. “오실라캤는데 긴급한 사항이 발생해서 못오신다고 안 했십니까. 그래 양해를 구했으면 됐지 뭐 말이 많십니까.”
옆에 있던 이용희 의원이 참다못해 끼어 들었다. “뭐야 이런 뻔뻔한….” 불필요한 다툼을 막으려고 김대중 총재가 나섰다. “마,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들이 나한테 저지른 두 번째 잘못은 바로 이 서약섭니다.”
권정달 대령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약서가 뭐 잘못됐십니까.” “잘못된 게 아니라 여기에 보니까 서로 협력해서 정국을 안정시키도록 노력하자는 아주 좋은 말이 있어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나하고 같이 협력해서 정국을 안정시키자고 한다면 당신들은 내가 이런 서약서를 쓴다고 해도 말려야 합니다. 그게 협력을 구하는 쪽의 취할 태도인데 당신들은 지금 나한테 서약서에 서명 날인할 것을 강요하고 있어요. 내 비록 사면 복권이 안되더라도 이런 서약서에 서명을 할 수는 없소. 가지, 이 의원.”
여기서 진술이다. S대령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해프닝은 단순히 해프닝으로 끝날 게 아니라 80년 초 ‘서울의 봄’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정국 현황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극히 중요한 한 순간이었다. 어째서 그러냐. 그때 만일 김대중씨가 문제의 서약서에 서명 날인을 했더라면 그후의 정국 현황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권정달 대령의 증언이다. “그날 우리는 김대중씨로부터 꼭 서명 날인을 받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김대중씨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고 또한 우리로서는 확실한 상황 판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김대중씨를 한 번 만나보자 이리케 된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과열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가, 하기에 따라서는 진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래봤자 더욱 시끄러워질 테니까 대응책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분한테서 상당한 것을 얻어냈다. 무엇보다도 대중경제론 등에 대해 얘기해 본 결과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문제의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단초를 만들었던 신민당 동교동계 이용희 의원의 진술은 또 다르다. “11월 말, 그러니까 79년 11월 말이다. 합수부 수사1국장 이학봉 중령을 만났을 때 이 중령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함께 잘해보자는 얘기가 여러 번 오고 갔다. 그런 것으로 봐서, ‘아, 이 사람들이 우리 김대중 선생이 워낙 비중 있는 인물이니까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해가 바뀌어 80년 2월, 그러니까 12•12사태 두 달 뒤였다. 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바로 서명 날인을 강요한 서약서가 그것이다. 그때 우리가 서약서에 서명 날인을 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공존의 방법을 찾는다. 이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지만 김대중 선생은 군부 특히, 신군부와 야합할 수는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재판 모습 | ||
결과적으로 80년 2월. 어쩌면 이루어질 뻔한 전두환과 김대중의 첫 만남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가 곧바로 5•17사태로 그리고 DJ 김대중을 또 한 번 죽음의 벼랑끝으로 몰아간 것이다. 결국 신군부의 유화 제스처에 순순히 응했더라면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랬더라면 우리 정치는 얼마나 선진화 될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하다. 다만 미래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할 뿐이다.
어쨌든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89년 1월12일 5공 핵심 이학봉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구속되었다. 죄목은 직권남용죄. S대령의 진술. “이학봉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곰’이다. 6척 장신의 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80년 초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과정에서 그는 언론으로부터 구 소련 KGB 의장 베리아와 비교해 ‘한국의 베리아’로 통했다. 합수부의 수사국장으로 대한민국의 수사권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5•17 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발표된 김대중 등의 내란 음모 사건, 김종필 등의 권력형 부정 축재자 처리, 그리고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시킨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이학봉 전 민정수석이 구속된 지 15일 뒤인 1월27일 검찰은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구속했다.
구속되기 약 두 달 전, 장세동씨는 몇몇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안기부장 사임 후 언론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의 진술 몇 대목을 인용해 보자. 당시 분위기에 대한 기자의 묘사. ‘멀리 창 밖으로 우면산이 바라다 보이는 서초구 서초동 그의 자택. 응접실엔 운보 김기창, 소정 변관식 등의 산수화 소품이 양 벽면에 장식돼 있고 다른 한쪽엔 그가 수경사 30경비단을 떠날 때 부하들이 만들어 준 기념패가 놓여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응접실과 이층 서재, 그리고 그가 서초동 카페로 부르는 서재 밖 베란다로 자리를 옮겨가며 진행되었다. 이층 서재 한쪽 벽면엔 훈장 20여 개가 장식돼 있어 화려했던 그의 전력을 말해 주고 있다. 기자의 질문. “요즈음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안기부장을 그만둔 후엔 비교적 한가합니다. 책도 읽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만나서 원망의 소리, 한풀이하는 것도 들어 주고 옛 전우들도 만나고 합니다.”
“필드엔 자주 나가는 편입니까.” “골프장 말입니까. 근래엔 자주 못 나가는 편입니다. 국회 5공특위 준비를 위해 자료도 정리하고 민정당 관계자들과 만나느라 좀 바쁩니다.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 정도 나갑니다.” “그렇다면 국회 5공비리특위 증언엔 출석한다는 얘기군요.” “물론 출석해야죠. 며칠 전, 5공특위 문서검증반의 초대장에도 응할 생각이었는데 민정당에서 문서검증반엔 나와라 말아라 할 권한이 없으니까 나갈 필요가 없다고 그래요. 정당간에 이견이 있는 자리엔 굳이 나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나가지 않았는데 정당간에 합의가 된다면 언제든지 나갈 겁니다.”
다시 기자의 질문. “5공 비리 문제로 세상이 크게 시끄럽습니다. 5공화국의 핵심 인물로서 심경이 어떻습니까.”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올림픽이라는 동서화합의 상징이자 우리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축제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는 현실에 원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진통으로 생각합니다. 전두환 대통령께서도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계시고, 맞을 이유가 없는 돌팔매를 맞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그분에게 올바른 평가와 성원을 보내드릴 날이 올 것을 믿고 있습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단기필마의 자세로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과연 그의 말대로 유권자들이 올바른 평가와 성원을 해 줄 것인지 의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에는 품위 있는 싸움이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디를 봐도 이전투구 일색이다. 국가정보원의 감청 문제를 놓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상호간에 정치 생명을 건 진검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이웃 일본의 정치 풍토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호메고로시’라는 차원 높은 전술이다. 일본어의 ‘호메루’는 ‘칭찬하다’라는 의미다. ‘고로스’는 ‘죽이다’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칭찬을 해서 죽여버린다’는 뜻이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두고 말들이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산 경남 지역 민주계 의원들의 노무현 지지 선회를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를 앞두고 나온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은 이회창 후보로 하여금 구시대적인 정치인으로 비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오히려 노무현 후보를 도와주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오게 된 것이다. 결국 YS의 지지가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를 깎아 내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인제 의원과 손잡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마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게 되면 이른바 ‘반창 연대’는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번 대선을 ‘반(anti) 창’과 ‘비(non) 노’의 싸움이라고 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언론에서 만들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누가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누구가 더 싫기 때문에 찍는다’는 부정적인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과연 21세기 ‘한국’호의 선장은 누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