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공과 6공의 유착관계를 폭로하려 했던 장세동 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만류로 순순히 구속 을 당한다. | ||
현재로서는 이회창 후보에 대한 이인제 의원의 지지선언 발표 여부와 정몽준 의원의 노무현 후보 지지 TV 연설 출연 여부가 가장 폭발력 있는 변수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두 유력후보자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군소후보자들의 선전이다. 흔히 들리는 얘기는 권영길 후보가 선전하면 노무현 후보가 불리하고, 장세동 후보는 이회창 후보 표를 잠식할 것이라는 것이다.
장세동 후보는 얼마전 어느 길거리 유세에서 빗자루를 들고 ‘낡은 정치를 확 쓸어버리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80년의 신군부 5공 핵심세력의 한 사람인 장 전 안기부장이 낡은 세력을 청산하겠다고 나왔다. 이러한 명분과 함께 또 하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5공 세력들의 명예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장 후보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출마를 의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곧이 들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장세동 후보는 89년 초 5공 핵심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기 전 백담사의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하소연을 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친인척들의 구속보다도 더 마음 아파하며 답장을 보내 위로했다.
요즈음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다 한다. 사나이들의 의리와 폭력을 미화한 내용이다. 우리 사회에 의리라는 것이 자취를 감추게 되자 그 조직이나 집단의 성격과 목적을 떠나서 일단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보여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의리’ 또한 좋은 사례이다.
최근 이회창 후보가 선전하고 있는 경상도 지역에서 장세동 후보가 상대적으로 더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 경상도 사나이들이 의리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야인시대〉의 시청률 또한 경상도에서 더 높게 나오는 것일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신의라고 하는 덕목은 점점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심화시킨 것이 정치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한다.
89년 초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인터뷰를 한 기자의 회상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나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거리낌없는 자신감에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국민들이 뭐라고 하든 5공화국의 치적을 평가받을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는 듯싶었다. 그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좋지만 그 모든 것이 국가 발전에 장애 요소가 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인터뷰 답변 내용이다.
“기자가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의도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5공화국 때의 정치 이면사를 알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장세동이라는 한 인간을 알고자 하는 것인지 이미 구상이 돼 있겠지요.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같이 즐기는 잠자리라도 그것이 거리로 나왔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게 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사람은 밝히지 못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부각시켜 달라는 주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자가 알아야 할 것은 국가의 정보 책임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운이 융성할 때는 모두가 화합해야 합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인간관계에 금이 가고 국론이 분열되고 그리하여 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가게 돼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진술이다. S대령이다. “구속되기 며칠 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위 윤상현을 통해 백담사에 모종의 편지를 전달한 사실은 알려져 있다. 이 편지를 받은 전 전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답장을 써서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윤상현을 통해 장 전 안기부장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다. 그렇다면 이 편지엔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느냐….”
이즈음 청와대에선 비상이 걸렸다. 이현우 경호실장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각하 경호실장입니다.” “어떻게 됐나. 장세동이가 백담사에 보낸 편지 그라고 백담사에서 장세동이에게 전달된 편지 내용을 알아 봤나?” 노 대통령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내용까지는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편지가 어떻게 전달됐는지 경위는 파악이 됐습니다.” 작아지는 이현우 경호실장의 목소리에 반비례해 노 대통령은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 노 대통령을 ‘협박’해 위기를 넘긴 허문도씨(오른쪽). 사진은 청와대 비서관 당시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김충립 보안사 소령과 대질신문하는 모습. | ||
“엉뚱한 내용이라면 어떤 내용입니까.” “검찰에서 장세동이를 구속한다 캐서 내가 제지를 했어. 그런데 장세동이가 이거를 알고 백담사에 지원을 요청한 거 같은데 혹시 그런 거 아니야. 영장이 집행되면 5공과 6공간의 유착관계를 몽땅 폭로하겠다 뭐 이런 거 말이야.” “그런 내용이라면 그대로 놔둬서는 안됩니다. 제가 나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야 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서울과 백담사, 그리고 백담사와 서울을 오고 간 편지와 답장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추측은 그렇다. 서울에서 백담사로 전달된 편지에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취할 모종의 조치에 대해 윤허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고, 백담사에서 서울에 전해진 답장에는 장세동의 강경대응을 만류하는 간곡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세동아, 모든 일이 다 내 탓이다. 안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네 편지를 보니 더욱 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용서해라. 세동아….’ 편지를 받아든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오열을 터뜨린다. ‘아닙니다. 각하…. 아닙니다. 각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만류로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고 검찰의 소환에 순순히 응한 것이다.
이와 달리 소위 3허씨 중의 한 사람인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은 다른 행동을 보였다. “정무수석 최창윤입니다.” “나 박철언입니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허문도 전 장관의 얘기를 듣고 최창윤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했다. “아, 박 보좌관 무슨 일입니까.” “내가 지금 각하로부터 크게 꾸중을 받았어요.” “또 무슨 일로 꾸중을 들었습니까.”
“허문도 알지요.” “통일원 장관 허문도 말입니까.” “그 사람이 야 3당이 요구하고 있는 5공 핵심 멤버 6인 중에 들어 있는 거 알고 있지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기 아닙니다. 사법 처리의 대상으로 지목된 여섯 사람 중에 들어 있어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 사람이 그 문제와 관련해서 항의라도 해 왔습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또 모르겠는데 각하께서 별도 보고를 받은 바에 따르면 간접적으로 협박을 하고 다닌다는구만.”
최창윤 정무수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협박을 하고 다닌다면 누굴 협박하고 다닙니까.” “참 못 알아듣네, 아 누군 누굽니까 각하지요.” “각하를요? 그렇다면 허문도씨가 아니 허문도 그 사람이 대통령 각하를 협박하고 다닌단 말입니까!”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비서실 출신 L비서관이다. “해가 바뀌어 89년 1월 5공 청와대 이학봉 민정수석이 구속됐다. 그러나 이학봉 민정수석의 경우는 5공 핵심 6명의 사법 처리하고는 별도의 케이스였다.” 별도의 케이스란 그 해 89년 1월24일 야 3당 총재 회동, 즉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야 3당 총재 회동에서 사법 처리를 요구하기로 합의한 5공 핵심 6명과는 별도로 처리된 경우라는 뜻이다.
참고삼아 이때 야 3당 총재가 지목한 6명의 5공 핵심은 광주 문제와 연루된 정호용 당시 특전사 사령관.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이희성. 5공 정권의 정치 자금과 관련된 이원조 의원. 4•26부정선거와 관련된 안무혁 당시 안기부장. 일해재단 설립 등과 연관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 그리고 80년 언론 대학살을 주도한 허문도 전 문공부 장관 등이다.
다시 L비서관의 진술. “따라서 이 6명에 대한 6공 정권의 사법처리는 1월27일에 구속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시간적으로는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5공 6공 비리와 관련해서 정호용 이희성 이원조 안무혁 장세동 등 거의 전원이 사법적 심판을 받았는데 꼭 한 사람 언론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5공 핵심 인물이 있었다. 바로 허문도 전 문공부 장관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처벌 대상에서 벗어났느냐….”
다시 최창윤 정무수석과 박철언 정책보좌관 사이의 통화 내용이다. “박 보좌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허문도 그 사람이 대통령 각하를 협박하고 다니는 내용이 대체 뭡니까.” 박철언 보좌관이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거야 뻔하지.” “뻔해요?” “6•29선언의 진상이라든가 아니면 5공과 6공간에 주고받은 정치 자금의 내역이라든가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최창윤 정무수석이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다.
“아 그것을 미끼로 해서…. 그래서 각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한테 전화를 걸어서 정책보좌관이 그런 것도 모르고 뭐하고 있었느냐, 꾸중을 하신 뒤에 이렇게 지시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 내용이다. ‘어쨌든지 허문도의 입은 막아야 해.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하자고 하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놈아가 또 무신 수작을 하고 나올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무신 수를 쓰든지 조용하게 두 번 다시는 대통령을 공갈 협박하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처리해 봐. 이상이야.”
그러나 허문도씨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제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당황한 6공 청와대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람을 보내 허문도의 입을 좀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어쨌든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은 5공 핵심으로 지목된 여섯 사람 중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 남았다. 정치에서 신의나 의리보다는 다른 자질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