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을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해 중간평가를 추진하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그러나 얼마 후 이종찬의 ‘사심’에 대해 강한 공격을 날린다. | ||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권은 노태우 정권시절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에 대응하는 3김 연합에 의한 거대 야당이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이라는 비상수단으로 다시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 거대 여당의 후보가 지난 97년의 이회창 후보였고 2002년에는 거대 야당 한나라당의 후보였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가의 그 어떤 자질이나 덕목 보다 ‘오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번에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2007년에는 어떤 후보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 것인지 벌써부터 관심의 대상이다. 88년 말 6공 노태우 정권은 선거 공약인 중간평가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 서서 백담사 전두환 전 대통령과 5공 세력과의 단절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는 믿었던 친구의 배신이라는 참담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승려들조차 하기 어려운 1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S대령의 증언이다. “그 해 그러니까 89년 1월12일 청와대 이학봉 전 민정수석이 구속됐고 잇달아 15일 뒤 1월27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또한 6공 검찰에 구속됐다. 백담사의 전두환 이순자 부부에겐 이 두 가지 사건이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진 것이다. 물론 위협을 느끼기 이전 먼저 감정의 폭발이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내가 백담사에 들어 온 지가 벌써 얼마야. 한겨울이 가고 어느덧 봄이 올라카는데 안부 편지는 고사하고 전화 한 통이 없어. 전에는 무신 날만 되면 쫓아와 알랑방구를 뀌더니 대통령이 됐다캐서 이래도 되는 기야? 대통령을 누가 만들어 줬는데 이렇게 우리를 배반해도 되나 이 말이야. 표리부동한 놈 같으니!”
다시 S대령의 회상.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 한 분이 백담사를 찾아 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현임께서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다하다 보니 시간도 없고 또 현직 대통령으로서 백담사까지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부인이 계시질 않습니까? 직접 찾아오기 어려우면 영부인을 보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도 없었지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반응이다. ‘난 또 무신 얘기라고. 그런 얘기는 노태우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거야 인간된 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나 할 수 있는 얘긴데 그 사람이 어디 그런 사람인가요.’ K목사는 이때의 대화 내용을 서울로 올라가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실 그대로 전달했다.
이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는가. “각하, 원내총무 김윤환입니다.” 어려운 일을 상의할 때 자주 김윤환 원내총무를 찾는다. “다른 기 아니고 김 목사 알지요? 그 사람이 백담사엘 다녀왔는데, 그쪽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기 아닌 거 같애.” “그거야 각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던 일 아닙니까?” “알고야 있었지만 누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줄 알았나? 어때요, 김 총무가 한 번 백담사에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닌가?”
“백담사에 가서 전임의 불편한 심기를 풀어드리라 이 말씀입니까?” “아니지. 우리가 어떻게 풀어주고 말고 할 수 있겠나?” “그러면 지가 뭐 하러 백담사엘 갑니까?” “심기가 불편하다는 거는 다른 의미에서 그만큼 마음이 약해졌다는 증거가 돼.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이 바로 전임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가서 한 번 잘 설득해 봐.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해서 증언하는 것으로 5공 청산 문제를 마무리하도록 말이야.”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신 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그쪽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백담사에 전화해서 한 번 찾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두 분께서 1백일 기도에 들어가 있어서 때가 좋지 않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기 언제야?” “2월6일인가 시작했다 캤으니까 끝나는 거는 5월 중순쯤 될 것 같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낭패로구만. 그렇게 되만 5월 중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야.”
▲ 88년 말 중간평가 실시를 서두르던 이종찬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왼쪽)에게 박철언 정책보좌관 (오른쪽)은 제동을 건다. | ||
오랜 채식 후에 일어난다는 비윗병이었다. 이때가 바로 1백일 기도의 한 고비였는데 이윽고 70일째를 맞이하자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참기 어려웠던 증상들이 사라져버렸다. 증오와 배신감 그리고 억울함과 분한 마음이 마음속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듯한 큰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윽고 5월16일 1백일 기도가 끝나고 회향하던 날 전국에서 수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몰려와 축하해 주셨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생각하고 남을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에 오는 충만감은 나에게 하나의 큰 축복이었다.”
여기서 백담사 일지 기록을 보자. ‘89년 5월30일. 선박용 발전기 한 대를 설치했다.’ 그때까지는 경운기용 엔진 5㎾짜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전등 몇 개도 밝히기 어려웠고 텔레비전 시청도 극히 제한된 시간에만 가능했다. 선박용 엔진은 퉁퉁거리는 소리가 좀 시끄럽긴 했지만 출력이 10㎾나 돼 전 대통령 내외의 백담사 생활이 크게 문명화된 듯했다.
이날 서울로부터 민정당 원내총무 김윤환 의원이 찾아왔다. 그의 임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관련 그 동안 여권에서 조정한 결과, 즉 1회에 한 해 비공개로 서명 질의를 하고 각 정당에서 한 명씩 보충 질의를 한다는 내용의 조정안을 전달하고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5공 청산을 마무리하는 증언이라면 공개 비공개와 관계없이 나가서 증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6공 정권의 중간평가 및 정호용 몰아내기로 돌아가자. 6공 청와대 비서실 L비서관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이종찬 사무총장은 절대 금기인 대권의 꿈을 숨기지 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것을 알고 있었던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그렇지 않아도 중간평가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던 차에 이것을 계기로 이 총장 견제에 나선 것이다.”
이종찬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의 회상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분명히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했다. 그 결과가 12월8일의 당정 개편으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을 정무장관에서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이동 기용하는 인사가 바로 그 것이다. 12월8일의 당정 개편 인사를 보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를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당을 장악해서 중간평가 준비 작업을 추진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당 조직 강화책으로 지역구 행사와 당원 연수 등 눈코 뜰 새 없이 뛰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제동을 걸고 들어 온 것이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이었다.” 박철언 보좌관의 진술. “중간평가는 법적으로 무신 근거가 있는 기 아니지 않은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고 또 한다캐도 천천히 상황을 봐 가면서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이거를 갑작스럽게 밀어 붙일라고 하는 거는 대체 무신 이윤가.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거기엔 중간평가를 이용해서 뭔가 다른 목적을 이룰라카는 엉뚱한 의미가 담겨 있는 거 아니겠는가.”
여기서 진술자를 바꾸어 이 말의 의미를 풀어보자. 6공 청와대 비서실 출신 L비서관이다. “박철언 보좌관의 그 말은 한마디로 사무총장 이종찬 의원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리고 이 불신은 박 보좌관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권 핵심부, 나아가서는 노태우 대통령의 이 의원에 대한 의혹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여권 핵심부의 의심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이종찬 의원의 대권에 대한 야망이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 의원의 꿈을 분수에 넘치는 야망으로 본 것이다.
그런 내용의 노 대통령의 뜻이 처음으로 이종찬 의원에게 전달된 것은 해가 바뀌어 89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당직자 회의에서였다.” 그다지 밝지 않은 얼굴로 노태우 대통령은 당직자 회의실로 들어섰다. “모두 앉으소. 박 대표, 전원 참석했습니까?”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보고했다. “예, 전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할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먼저 듣자니까 지난 번 당직 개편 후에 민정당 내부가 크게 소란해졌다카는데 이유가 뭡니까?” “무신 말씀인지 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데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어데서 들었는지 내가 그런 것까지 박 대표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당내엔 조금도 소란스러운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노 대통령의 언성이 높아졌다. “없기는 뭐가 없습니까? 당 조직을 강화한다는 핑계로 일부 당직자 중에 자기 조직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있다카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과연 당의 화합이 유지되겠습니까?”
이종찬 사무총장이 나섰다. “각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각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내가 오해를 해요?” “유사시에 대비해서 당 조직을 정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의 조직을 정비 강화한다는 구실로 일부 당직자들이 자기 조직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인 노태우 대통령이 탁자를 내리쳤다.
“이보시오, 이 총장! 시방 당 총재를 허수아비처럼 여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겠소. 지금까지 우리 당에 TK가 있다 카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SK가 있다는 얘기는 못들어 봤어요. 그런데 이 총장 취임 후에 갑자기 SK가 등장했십니다. 바로 이 SK가 이 총장을 축으로 하는 별도 조직이 아니냐 말이요!” SK란 서울 경기 지역 출신 의원 모임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만일 이러한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때 노태우 대통령은 왜 이종찬 의원을 당 사무총장으로 기용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중간평가 준비작업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