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는 부총재 경선에 나가려던 최형우의원을 말려 원내총 무를 맡겼다. 5공청산을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 ||
섭섭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노무현 후보를 찍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때문에 당선됐다고 믿지는 않을까. 심지어 막판에 정몽준 대표가 사퇴를 해서 짐을 덜어 준 것도 오히려 당선에 도움이 됐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논공행상에 부담이 많았다. 30여 년 가까이 동고동락을 해 온 동지들을 외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욱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동지에 대한 부담은 적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5공 정권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정권부터 정치적 기득권 세력들이 이제 노무현 대통령 시대 도래로 완전 물갈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0월 하순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바닥을 밑돌고 있을 때 한 인기 탤런트의 지지 연설을 들으면서 노무현 후보는 눈물을 흘렸다. 그 장면을 본 많은 지지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당시 그 탤런트는 우리 역사가 바라는 개혁을 이뤄낼 마지막 유일한 리더가 누구냐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 흘린 노무현 후보의 눈물은 그간 정치적 고뇌의 순간에 느꼈던 외로움과 좌절에 대한 서러움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흘려야 할 눈물은 어떤 눈물이어야 할까.
필연적으로 있게 될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될 정치적 동지들을 처단해야 할 ‘읍참마속’의 눈물이리라. 40년지기 전두환 전 대통령을 눈 덮인 백담사로 유배를 보내고 노태우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을까.
1988년 국내 정국은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5공 비리 청산의 핵심인 정호용 의원 처리 문제, 그리고 백담사에 은둔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문제 등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YS 김영삼의 상도동측 움직임을 살펴보자.
최형우 전 의원이 상도동을 찾아 왔다. “총재 어른,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지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예? 알고 계시다니오?” “아니면 총재가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하나? 당 부총재 경선에 나가겠다는 얘기하러 온 거 아니야?” “예,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안돼.” “어째서 안됩니까?” “어째서 안되긴 뭐 어째서 안돼! 여기 김동영이나 최형우가 시방 한가하게 부총재 경선에 나갈 때야!” 최형우 전 의원도 만만찮았다.
“한가해서 나갈라카는 기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거보다는 부총재라도 해서 총재 어른을 좀 더 실질적으로 보좌해 드릴라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김영삼 총재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어이 김동영이 니가 좀 설명해 줘라. 내 잠깐 다녀올 테니까?” 김영삼 총재가 나가자 김동영 전 의원이 입을 열었다.
“최 의원. 총재 어른께서 최 의원에게 원내사령탑을 맡기려는 생각이신 것 같소.” “원내사령탑? 아니, 그럼 내 보고 원내총무를 하라고!” “그래가지고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5공 청산 그라고 전두환이를 국회 증언석에 끌어내는 일 등을 관철시키도록 밀어붙인다는 생각이신 것 같소.”
여기서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 나타난 최형우 전 의원의 진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백담사행 이후 정국은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문회 파동은 해를 넘기면서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89년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5공 청산이라는 신조어를 되뇌이는 한 해가 된 것이다.
▲ 89년 7월2일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가운데) 등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한매일] | ||
부총재 경선 출마 대신에 원내총무가 된 최형우 전 의원은 첫 번째로 평민당의 김원기 원내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나, 최형웁니다.” 김원기 의원이 전화를 받았다. “아이구, 이 통일민주당 신임 원내총무시구만. 안그래도 내가 최 의원이 원내사령탑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전화를 올리려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최 총무가 먼저 전화를 하셨구만.”
“뭔가 오해를 하신 거 같은데 나는 축하 인사 받으려고 전화한 거 아닙니다. 우쨌든 내가 야3당의 한 축이 됐으니까 공화당의 김용채 총무하고 같이 만나서 상견례라도 해야 안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야3당뿐 아니라 민정당의 김윤환 총무까지 끼워서 넷이서 만나도록 내가 주선하겠습니다.”
여소야대의 4당 체제 하에서 각당 원내 총무들의 ‘샅바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의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민정당의 원내총무를 맡았던 당시 김윤환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4•26총선으로 여소야대의 정국 구도가 형성됐다. 선거 다음날인 4월27일이었다. 노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와서 지역구에서 올라왔더니 원내사령탑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원내총무 자리였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여소야대 구도하의 소여 원내총무에 취임했다. 개원 국회 다음날인 7월2일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을 처리했는데 이기 그만 부결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참말로 그때 심정은 울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당시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반드시 여소야대 국회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평민당과 민주당은 거대야당의 세를 과시하는 데 합의하여 백지투표를 강행함으로써 반대 표결에 성공했지만 제3야당인 공화당은 정기승 내정자가 김종필 총재와 같은 충남 출신인데다 전부터 교류가 있어왔던 인연으로 사실상 동의안 가결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당시 김종필 총재의 발언. “내가 말 안해도 의원 동지들께서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국회의 관행은 인사 문제에 관한 한 토론 없이 무기명 비밀 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오후 본 회의에서 치르게 돼 있는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에 대해서는 총재인 나로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이 자리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은, 나하고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하고는 같은 충남 출신인 데다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어 왔기 때문에 나로서는 임명 동의안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순간 국회 본회의장은 술렁거렸다. 이와 같은 김종필 총재의 발언은 사실상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을 가결시키라는 총재의 지시와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다 민정당과 공화당 사이엔 이미 물밑 교섭을 통해 가결시킨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법원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은 가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왜 표결 결과는 과반수에 7표가 모자라는 부결로 나타났는가. 이 부분 또 다른 진술자가 있다. 사태 당시 제1야당인 평민당 원내총무 김원기 현 새천년민주당 개혁위원회 위원장의 증언이다.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이 야3당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민정당과 연합 전선을 펼쳤기 때문에 숫자상으로는 가결선에서 일곱 표가 남았다. 그런데 개표 결과는 일곱 표가 남은 게 아니라 오히려 일곱 표가 모자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기승 대법원장 내정자의 임명 동의안은 부결됐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그때 민정당은 공천 과정에서 5•6공 차별화에 따라 초선 의원이 많이 배출됐다. 이 사람들이 투표 때 기표 방법을 잘 몰라 가지고 ‘가할 가(可)’라는 찬성 표시 대신 ‘찬성할 찬(贊)’자로 기표하고 또 내정자 정기승의 이름을 한글이나 한문으로 기표하는 바람에 이 표가 다 무효표가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쓰지 못하는 표가 된 것이 14표가 나왔는데 숫자상으로 일곱 표가 남아야 할 것이 오히려 일곱 표가 모자라는 결과가 된 것이다.”
김원기 당시 사무총장의 기억은 사태 당시에도 그랬듯이 파안대소 통쾌한 웃음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소여의 원내 사령탑 김윤환 원내총무의 기억은 쓰라린 것으로 남아있다. 상황은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89년 3월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즉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를 하지 않게 되는 의문의 과정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즈음 노태우 대통령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들만 비밀리에 청와대로 불렀다. 최창윤 정무수석이 보고했다. “각하, 정무수석입니다. 이춘구 의원을 비롯해서 최병렬 문공장관,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라고 박철언 보좌관까지 다 모였습니다.” “아, 그래. 오늘 모임은 비밀로 하라 캤는데 보안 조치는 잘 돼 있겠지.” “예, 연락하면서 보안을 지키도록 전달했으니까 누설은 안됐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당직자들이 알면 안돼요. 무신 말인지 알겠지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직자라면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는 듯이 쳐다보는 노태우 대통령. “사무총장이 알아서는 안 돼. 이종찬이 말이야.”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 비서실 출신 L비서관이다. “89년 3월9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극비리에 이춘구 의원을 비롯해서 최병렬 문공장관, 김용갑 총무처 장관 그리고 박철언 보좌관 등을 청와대로 소집했다.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측근 중의 측근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를 내렸다.”
회의실로 들어오는 노 대통령을 보자 다들 일어섰다. “아, 다들 모였구만. 내, 오늘 여러분을 들어오라고 한 거는 중간평가와 관련해서 지시를 하달하기 위해섭니다. 먼저 이춘구 의원. 이 의원은 중간평가를 하자는 쪽입니까, 아니면 하지 말자는 쪽입니까?” 그날 노 대통령은 모인 사람들에게 일일이 찬반 여부를 물었다. 저마다 정답을 알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자 다혈질의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나섰다. “각하, 대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기 아니라 각하께서는 중간평가를 받으실 생각입니까, 받지 않을 생각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과연 노태우 대통령의 의중과 명분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