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년 초 국민회의-자민련 의원총회에서 만난 박철언 (왼쪽)과 DJ. | ||
여소야대 구도는 노 정권이 짊어진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다. 대북 송금 의혹 사건 등으로 거대 야당에 발목이 잡힌 당선자와 민주당 신주류측으로서는 개혁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다’는 것이 노 당선자의 거듭된 약속이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정계개편 불가피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과연 노 당선자는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묘수를 내놓을까.
우리는 지금 5공 청산, 중간평가 문제 등으로 야 3당의 압력을 받고 있던 6공 노태우 정권의 물밑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다. 노 정권이 여소야대 구도의 타개책으로 삼은 것은 바로 합당을 통한 정계개편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그 언제 정계개편, 즉 3당 합당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누가 3당 합당을 건의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노태우라는 인물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몇 가지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당시 권력 핵심들의 진술과 증언이다.”
S대령이 제시하는 권력 핵심들의 진술과 증언.
먼저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 의원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에서 크고 작은 정계개편이야 늘 있어 왔지만 아마 내 기억에는 88년 4월 총선 결과 여소야대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정계개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의중을 쉽게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평소 생각해 오던 우리 정치의 양대 주류인 보수 진영과 진보 개혁 성향을 가진 진영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 정계개편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식 양당제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일본식 내각제의 장점을 살린 형태로 4당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정계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술은 그렇다. 궁극적으로 3당 통합을 염두에 두고 정계개편을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한 것은 88년 4·26총선 직후부터였다. 이에 대하여 또 한 사람의 3당 통합의 주역, 당시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의 증언이다.
“아직 날짜도 생생한데 88년 1월9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하고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정계개편을 위한 세 가지 방안을 건의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김윤환 총무가 건의한 정계개편을 위한 세 가지 방안은 이렇다.
첫째, 제1야당 평민당과의 정책 제휴. 이 경우 민정당은 주도권을 상실하고 평민당에 끌려다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째, 공화당과의 합당. 이 경우 의석 수에서는 과반수에서 13석을 넘길 수 있으나 양당의 성격상 유신 본당과 잔당의 통합이라는 국민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공화당과의 합당은 상대적으로 야당을 자극하여 평민, 민주 양당의 통합을 부채질하게 된다.
셋째, 민주당과의 합당. 현실적으로 가장 유리한 방향이지만 김영삼 총재(YS)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다시 89년 초의 정국 상황으로 돌아가자.
여소야대 구도 하에서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위험천만한 정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소여’, 작은 여당 민정당의 몸부림은 중간평가 유보, 정계개편 그리고 마침내 민정, 민주, 공화의 3당 합당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김윤환 당시 원내총무의 직접 진술이다.
“그때 정무장관으로 있다가 선거 끝나고 원내총무를 하라캐서 맡게 됐다. 당시 처음에 평민당과의 정책 제휴를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평민당을 뺀 3당 통합이 됐다.”
김윤환 의원의 처음 생각은 그랬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김윤환의 구상대로 3당 합당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 의원의 생각은 또 달랐다. 이른바 박철언의 ‘정계개편 그랜드 디자인’이다.
박철언 보좌관과 최창윤 수석이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왔다.
“정책보좌관 박철언입니다.”
“정무수석 최창윤입니다.”
“두 사람은 꼭 이리케 붙어 다니누만. 무신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야?”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그기 뭐 잘못 됐십니까?”
노태우 대통령이 박철언 보좌관을 보면서 말했다.
“잘못 됐다는 기 아니라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 알고 있나?”
최창윤 정무수석이 물었다.
▲ 4당 대통합을 진행하던 박철언에게 노태우 대통령은 평민당을 뺀 3당만의 합당을 하라고 선을 긋는다. | ||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는 말할 수가 없고 무신 말을 하는지는 말해주지. 최창윤 정무수석은 박철언이 사람이다. 이렇게들 말하고 있어. 무신 말인지 알겠어.”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박철언의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진술이다.
여소야대 구도 하에서 6공 정권의 중간평가, 정계개편 및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그의 구상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는가.
6공 청와대 비서실 L비서관이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은 일찍부터 주장해 온 3단계의 정치 철학이 있었다. 민주화, 민족 화합, 그리고 통일이다. 박 보좌관은 이와 같은 구도에 따라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려왔는데 문제는 이 그림이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림을 살펴보자. 계속되는 증언.
“1단계인 민주화는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과 재임중 6·29 정신의 구현으로 성취된다고 봤으니까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단계인 민족 화합은 이것이 바로 박철언 구상의 핵심으로 내각제 개헌과 정계개편을 배경으로 한 고질적인 지역 감정 해소였는데 여기엔 영호남의 화합 즉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끌어안아야 하는 최대의 과제가 있었다.
이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민정당 평민당 공화당 등 3당 연합이 가능해지고 여기에 YS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까지 끌어안으면 4당 합당이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의원들과 색깔이 의심되는 일부 세력을 털어내면 보수 혁신을 망라한 거대 여당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통일을 이뤄낸다는 것이 박 보좌관의 구도였다.”
박철언 정책보좌관의 구상은 그러나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힘든 이상이었다. 다시 89년의 청와대.
노태우 대통령이 박철언 의원에게 물었다.
“내한테 할 얘기가 있다 캤는데 무신 얘기야.”
“우선 저쪽하고의 막후 접촉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쪽이라면 어데야. 평민당이야 아니면 민주당이야?”
최창윤 정무수석이 말했다.
“평민당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시큰둥하게 반응을 보였다.
“평민당이야?”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내가 뭘. 그건 그렇고 만난 결과부터 말해봐.”
“일단 중간평가는 하지 않기로 합의가 됐습니다.”
“합의가 됐어?”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이때 노태우 대통령의 김대중 기피증이다.
S대령의 증언.
“89년 3월 중간평가, 정계개편 및 3당 합당 등의 정치 이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야 3당 중 제휴 상대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맞부딪치게 된다.
공화당은 이미 3월7일 JP 김종필 총재와의 양자 영수회담에서 JP 스스로 합당하자고 굽히고 들어왔으니까 일단 제외됐다. 따라서 나머지는 YS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DJ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인데 과연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 결과에서 보듯이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선택했다. 왜 그랬느냐….”
노태우 대통령이 두 사람을 불렀다.
“박철언이, 최창윤이.”
“말씀하이소.”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평민당하고의 제휴는 원치 않아. 제휴를 한다면 민주당하고의 합당을 연구해서 추진해봐.”
이 부분과 관련해 우리는 앞에서 김윤환 의원의 진술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그가 건의한 정계개편 3개 안 중 제3안의 내용이다.
즉, 세 번째 통일민주당과의 합당.
이 경우 공화당과의 합당마저 쉽게 이루어질 것이므로 3당 합당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보수 야당의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YS 김영삼에게 있으므로 정치적 색깔에 있어서 문제될 것이 없고 따라서 상당한 상승 작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즈음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는 YS를 만나고 있었다.
“총재 어른.”
김영삼 총재는 김윤환 총무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계십니까?”
“음? 아니야 아무 것도. 그러니까 시방 내한테 뭐라고 했나?”
“그만큼 간곡히 말씀 올렸는데 못들으셨습니까.”
“못들은 기 아니라 이해가 잘 안돼. 그래서 그러니까 어디 다시 한 번 말해봐. 그기 대체 무신 말이야.”
“말씀 올리겠습니다. 3당 통합입니다.”
정계개편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 백담사 전두환을 찾은 한 고위 인사가 있었다. 전임 국회의장 채문식 민정당 고문이었다. 여권 요직 인사로서는 최초의 백담사 방문이 되는 셈이었다.
‘입산’한 뒤 해가 바뀌어 89년 1월이 가고 2, 3월이 흐르고 그리고 4월. 백담사의 전두환 전임 대통령 부부는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백담사 일지에서 확인해 보자.
‘이 무렵 여권 내부에서는 어르신의 거처와 국회 증언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다. 어르신의 거처를 해외로 옮겨야 한다, 해외로 옮길 것이다 하는 출처 불명의 애드벌룬이 뜨는가 하면 월정사로 옮길 것이다, 연희동으로 돌아온다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뜬소문들이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1백일 기도가 끝나는 5월16일 이후에는 어쨌든 어딘가로 거처를 옮길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르신의 대답은 선문답일 뿐이다.’
안현태 경호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채문식 고문이 백담사 경내로 들어섰다.
“어르신네,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반가운 손님?”
“반가운 손님이 누구예요?”
“접니다. 영부인”
“어머나, 채 의장님 아니세요?”
“채 의장이 누구야.”
“채문식입니다.”
“채문식이?”
반갑다는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