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년 백담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 낀 전두환 전 대통령. 그는 측근을 통해 6·29선언이 자신의 작품이었다는 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방식으로 노 대통령 에게 ‘복수’를 한다. | ||
한국 정치사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의 집권기와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의 집권기는 흔히 신군부와 문민 시대로 대비된다. 20여 년 전 상극관계에 있던 이들은 숙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3김씨, 그 중에서도 특히 DJ 김대중과의 ‘만남’은 역사가 빚어낸 아이러니컬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불거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5공 초 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와 사면 복권을 남북 및 한미 관계라는 시각에서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한 월간지 기자와의 옥중 진술에 나타난 그의 생각을 살펴보자.
먼저 기자의 질문.
“81년 당시 주미 안기부 공사 손장래씨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측 협상 파트너 리처드 알렌과의 외교 교섭에서 정부 훈령을 받지 않은 채 김대중씨의 사면 문제를 거론한 것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이 동의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한 것이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상당한 작용을 했고 김대중씨의 사면이란 결실을 봤다. 그때 손 공사는 전 대통령에게 이런 내용의 공한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손장래 당시 안기부 공사의 공한 내용이다.
‘대통령 각하.
만일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김대중씨 문제를 이용한 것이 잘못이라면 각하께서는 본 공사를 파면시키고 교섭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람되나마 본 공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영향력 있는 야당 지도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결코 길조는 아닙니다.
만일 김대중씨를 처형한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김대중씨를 처형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정치 활동을 못하게 하는 방안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알면서 굳이 김대중씨를 처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손 공사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교섭 과정에서 구제되었다. (정상회담이) 김대중씨의 사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옥중 진술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대중씨를 사면한 게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대중을 사면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면을 했느냐. 한마디로 나의 정치 철학이 그렇다. 어떤 이유든 사형은 안된다. 더구나 그때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5공화국이 출범하던 시기이다. 그렇듯 경사스러운 때에 내가 어떻게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할 수가 있겠나.
거듭 밝히지만 나는 김대중씨를 죽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한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대중 사면을 전제조건으로 이용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인가.
그것은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기왕에 김대중 사면 문제가 거론됐으니 편지 한 통을 더 공개한다. 김대중의 구명을 간청하는 80년 11월27일자 김수환 추기경의 서한이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오늘은 특별히 간청할 일이 있어서 이 글을 드립니다. 김대중씨에 관한 청입니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긴 하오나 사태의 진전이 매우 우려됩니다. 대통령의 직권으로 최대의 관용을 베푸시와 그로 하여금 극형을 면하게 하여 주시옵도록 간청합니다. 이는 김대중씨 개인이나 그 가족을 위해서뿐 아니라 국내외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 국민적 화합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도 소망스러운 일로 사료되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용서와 관용은 하느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각하와 우리나라가 주님의 축복 속에 항구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끊임없이 기도 드립니다.
아울러 광주사태와 관련된 피고들 중에서 1심에서 극형을 언도 받은 정동년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도 같은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주시옵길 간절히 청합니다. 각하와 귀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1980년 11월27일 추기경 김수환 드림.’
그렇게 해서 목숨을 건진 김대중은 결국 훗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5년 간의 권좌에서 물러나 지금은 동교동 자택에서 칩거중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맛본 순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먼저다. 그것도 둘도 없는 친구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 백담사 시절 후 94년 다시 화해한 전씨(왼쪽)와 노씨. | ||
“백담사측이 노태우 정권의 일방적인 처사에 대항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이른바 ‘폭탄 선언’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백담사행을 놓고 승강이를 벌일 때에 그랬듯이 6·29선언의 진실과 87년 대선 때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에게 제공한 2천억원에 이르는 정치자금 문제였다.”
89년 5월20일. 백담사측이 한 월간지를 통해 발표한 폭탄 선언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전씨 측근들의 폭탄 증언을 부제로 하고 주 제목을 ‘6·29선언 전두환의 작품이다’고 하여 특종한 문제의 기사.
주요 부분을 살펴보자.
‘6·29선언은 제5공화국 정권의 파멸을 막고 선거에 의해 후계 정권을 창출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독재 지배층 내부의 자체적 궤도 수정이었다. 따라서 만일 이 선언으로 지배층의 재집권과 한국의 민주화가 가능했다면 적어도 이 선언을 주도한 사람은 엄청난 결단력과 정치력을 지닌 사람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이 선언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단독으로 결행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6·29선언의 과정이 너무나 잘못 알려져 왔다는 사실이다. 즉, 왜곡된 6·29선언을 근거로 해서 정치인 노태우를 평가하고 그의 지도력을 전망하는 식의 접근법은 전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6·29의 진실을 알고 있는 몇 명 안 되는 6공 핵심 중에 노 대통령의 측근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을 때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비키니를 꼭 벗겨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봤자 여자의 보기 민망한 알몸 밖에는 드러날 끼 없는데…. 신화가 없는 우리 역사에 6·29라는 신화를 하나쯤 남겨 둔다는 입장에서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낍니다.”
기사의 내용으로 돌아가자.
‘6·29선언의 양지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음지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서있다. 이와 같은 음지와 양지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합쳐질 때에만 6·29선언은 진실된 모습을 찾고 국민은 전·노 두 사람을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투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7년 6월20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이런 제의를 하고 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자. 내가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뒷받침하겠다.’
여기서 또 다른 기록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한 또 다른 월간지 97년 1월호에 실린 이순자 여사 회고록이다.
‘87년 6월17일 오전 10시. 그분(전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노태우 대표와 마주 앉았다(날짜에 착오가 있다. 이날은 6월17일이 아니라 20일이었다. 모든 관계자들의 증언이 6월20일로 집약되고 있다). 그분의 첫마디는 국민의 뜻이 그렇다면 직선제를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노 대표는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이 부분에 대한 다른 기록.
‘직선제를 받아들이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제의에 이날 노태우 대표는 자신이 없다면서 선뜻 응하질 않았다. 다음날 21일 전 대통령은 다시 노태우 대표를 불러 전날 그랬듯이 약 3시간에 걸쳐 노 대표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6·29선언의 핵심 사안인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 복권에 합의한 것이다.’
다시 이순자 여사의 회고록에서 보자.
‘그분은 자신이 호헌에서 개헌으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신념을 수정한 것과 관련하여 열정적으로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분은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분은 자신의 신념을 비겁해서 수정한 것이 아니라 용기로써 수정하였으므로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겠다는 노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직선제를 고려하게 된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다섯 가지 이유란 무엇인가.
‘첫째, 지금의 소요 사태를 물리적으로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비상조치는 정권의 불명예일 뿐 아니라 경제와 88년 올림픽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
둘째, 야당이 선거 보이코트를 하면 단일 후보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대외적으로 우스운 꼴이 될 뿐 아니라 당선된다 해도 불안한 집권이 된다.
셋째, 야당이 현행 간선제를 이용할 경우 기습적으로 선거에 열기를 올릴 수 있고 직선제에 비해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 설사 현행 헌법으로 선거에 승리해도 89년 개헌 논의는 불가피하다. 새로운 선거는 새로운 자금을 필요로 하고 국가경제에 큰 타격을 준다.
끝으로 다섯째, 현행 간선제에 비해 직선제는 결코 불리하지만은 않으며 오히려 당선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도 있다.’
다시 이순자 여사의 진술.
‘다음날 아침 10시 마침내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엄청난 환호가 뒤따랐다. 노태우 대표는 자신의 라이벌이 될 김대중씨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항에 달하는 엄청난 약속을 선언문 속에 담았다. 훗날 6·29선언으로 명명된 혁명적인 선언이다.
모든 언론은 민주화의 요구가 포함된 함량 만점의 선언으로 격찬했다. 40년 헌정사 속에 누적된 과제를 단숨에 해소시킨 명작이라고도 했다. 국민과 야당은 물론 외국 언론들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규제가 풀린 김대중씨도 노태우 대표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느낀다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누가 알랴. 6·29선언은 누가 뭐래도 그분이 이뤄낸 통치의 꽃이라는 사실을….’
이 혁명적인 선언에 직접 관여했다는 사람은 10여 명이 된다. 각자 자기가 그 문안을 기초했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원작자는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