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재단의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정주영(왼쪽서 다섯번째)이 내빈들과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 ||
초점은 이들 재단이 실질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존재해 왔느냐는 이른바 ‘주체론 시비’. 사실상 권력자와 재벌 그들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위장된 존재였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공공의 이익과 국가사회’을 향한 진정한 봉사 기부단체였느냐는 논란이다.
정주영이 기업 이익의 본격적 사회환원이란 ‘기염’을 토하며 출범시켰던 이른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峨山社會福祉事業財團)’. 우리 지도층의 공공재단 풍토란 ‘창(窓)’을 통해 이 기구의 실체와 의미에 다각 접근키로 한다. 먼저 현대측이 내세운 기록.
“우리 대기업들은 많은 기업 이윤을 해외도피하거나 사용(私用)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남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재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기업인들이 그 후에 문화재단이나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계기를 만들었다. 아산정신은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막대한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시킨 선구적 역할을 했다.”
아산재단이 설립된 것은 77년 7월1일. ‘현대건설’의 정주영 개인주식 50% 출연을 기초로 설립이 발표됐고, 매년 약 50억원의 배당 이익금으로 사회사업을 하도록 한 것. 본인은 그 배경으로 ‘주체론’까지 언급, 재계 풍토 전반을 비판한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가정과 사회, 국가의 주체도 역시 사람이다. 사람을 크게 괴롭히는 것으로 나는 병고와 가난을 꼽는데 이 두 고통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다. 나는 이를 복지재단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일부 재벌들이 복지재단이라고 유명무실한 간판만 달아놓고 절세(節稅) 수단으로 쓰거나 다른 영리 추구를 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던 터다. 나는 그러지 않기 위해 향후 5년 동안 우리가 할 사업을 못박았다. 나는 카네기재단이나 록펠러재단 같은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발표한 사업내용은 의료·사회복지 지원, 연구개발 지원, 장학 사업 등 4개 부분. 최대 역점은 의료사업. 취약지구 중심으로 77년 정읍종합병원 기공식을 가졌던 것을 필두로 79년 영덕종합병원 준공까지 약 1년 반 동안 정읍과 보성, 인제, 보령, 영덕 5개의 종합병원을 완공, 개원시켰고, 89년에는 서울중앙병원이 이 재단을 통해 개원했다.
현대측은 이 병원들을 통해 ‘10만명 이상’을 무료진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3개사업에서는 불과 몇 억에서 최대 몇십 억 수준의 지원금이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핵심은 의료사업 확대인 셈. 따라서 선진국 복지재단에 비교하면 큰 문제점이 발견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기업문화 전문가 차모(42)씨는 빌 게이츠의 경우를 예로 든다.
“빌 게이츠는 개인 재산 50억달러를 교육과 의료발전에 써달라고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미국에선 문화재단이나 장학재단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직접 재단을 만들지 않고, 뭘 믿고 이렇게 엄청난 거액을 선뜻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믿을 수 있는 회계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회계사들이 꼼꼼하게 평가해서 정기적으로 그 내용을 보내오는 것이다. 결국 한 사회의 건강성과 선진성은 이런 정직성과 투명성에 의해 좌우되어 나감을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결국 정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의료중심의 계열사를 늘린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경제전문 언론인 L모씨의 비평은 더 신랄하다.
▲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통해 지난 89년 건립된 서울중앙병원. | ||
“한국에서는 이 공익재단 문제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숨이 막힌다. 한국에도 세계적인 거부들이 많다. 포춘지와 포브스지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갑부에 10명 안팎의 재벌총수들이 꼭 포함된다. 그러나 이들이 사재를 진짜로 사회에 환원했다는 기사는 아직 찾아 볼 수 없다.
양대거부는 이병철씨와 정주영씨다. 이씨의 삼성문화재단을 ‘한국의 카네기재단’이나 ‘한국의 노벨재단’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아직 없지만, 정 회장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는 84년 4월 부산대 특강에서 ‘기업주들이 2세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있는 사실은 기업윤리상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고 타 재벌의 관행을 비판까지 했는데, 말과 행동이 너무도 다르다. 그 자신도 2세를 위한 상속·증여의 수단으로 계열사를 편법 운용해간 흔적이 도처에 있다. 그가 설치한 공익재단마저도 결국엔 또다른 계열사로 만들어간 형국이다.
한국에도 공익재단은 많다. 그룹마다 공익재단은 적어도 1개, 많게는 3~4개씩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공익재단다운 공익재단은 과연 몇 개나 되는가. 그룹총수의 상속·증여세 탈세수단으로 설립, ‘사실상의 지주회사’로 운영된 사례가 많다.”
‘한국형 기부문화’에 건강치 못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장하성(51) 교수의 전경련 자료를 토대로 한 진단을 들어보자. “한국 기업은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기부를 하고 있다. 전경련 발표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92개 기업이 96년 한햇동안 3천68억원, 세전 이익의 9.4%를 기부했다. 수치로는 미국 기업의 9배나 기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런 것일까. 전경련 자료는 재벌의 대학, 대형병원 설립 등을 기부로 분류해서 일어나는 착시(錯視)현상일 뿐이다. 한국기업의 기부는 사회에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자선이 아니라, 재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또 다른 투자인 것이다.”
실제로 전경련 조사에서 대재벌의 기부 가운데 현대아산재단에서도 드러났듯 병원 건립-운영 등 의료분야 지출의 비중은 지난 91년 13.4%를 기록한 이후 해마다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원윤희(43) 교수는“선진국 기업의 의료 기부는 빈민이나 유색인종, 결손가정 등에 직접적인 지원이 대부분이다. 재벌기업이 의료산업에 진출해 영리추구를 본연으로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기부라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정치권의 시각은 어떤가. 한 소식통은 아태재단과 아산재단을 비교, 이런 견해를 전한다.
“대통령의 아태재단이 범법부패의 온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 시대 대한민국 공공재단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단면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태재단 부이사장인 김홍업씨 구속은 국민적 의혹을 밝혀내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김병호 전 행정실장을 비롯한 아태재단 직원들의 직접적인 돈세탁 가담 의혹부터가 그렇다. 아태재단을 통한 이른바‘DJ 대선자금’은 수사의 가장 큰 뇌관일 것이다.
이곳의 부패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94년 재단 금고에서 도난당한 양도성 예금증서가 김우중 전 대우회장으로 되어 있었던 사실도 새로 확인됐다. 범죄성 오염원이 이처럼 위로부터 끝없이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공익재단이라고 선진형 모델을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즉, 정주영의 복지재단 문제도 결국 대한민국 정경시스템의 ‘작동 고장’안에서 빚어진 대표적 사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