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로도 ‘권력’이 재벌을 시장원리가 아닌, ‘호(好) 불호(不好)의 기준’으로 사실상 분류, 온갖 기법의 관치(官治)로 다스리려 해왔기 때문에 국가 경제구조의 공정한 흐름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재계 불만의 요체를 이루고 있다.
정권변환의 시기, 재계 막후에서는 어떤 일들이 과연 있었을까. 먼저 정주영 본인이 주장한 사례담. 역대 정치권력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5공정권이 치적으로 꼽는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예로 들어보자. 박 대통령이 추진하던 일을 5공은 사전상의도 없이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으로 나를 임명해 놓고 정부측 위원으로는 바덴바덴에서 그냥 여행이나 즐길 사람들을 뽑는 정도였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 성공시켰더니, 오히려 수수방관만 하고 재나 뿌린 5공 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고 으스대더라.
결국 나는 온데 간데 없고, 그들 정권의 몫으로 선전하고 다녔다. 이렇게 기업인은 이용만 당했다. 6공 때는 더더욱 기업활동하기가 힘들어졌다. 성금이란 명목의 정치자금은 정권이 바뀔수록 단위가 커져갔는데 미움받지 않으려면 뭉텅이로 돈을 바쳐야 했다. 6공에서는 3백억원의 돈을 정부에 바치고도 90년도의 불공평한 세무조사 이후 나는 정부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 자신의 ‘정치불신’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것.
본인의 계속되는 변. “기업하면서 수많은 정치지도자, 정치인을 만났지만 존경할 만한 정치인다운 정치인을 만났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권력은 무분별·무경우·무소신·무경험·몰염치·무능력이었다. 나라가 어디로 가든, 밤이나 낮이나 자기네들끼리의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걸핏하면 세무조사에 걸핏하면 잡아넣고 걸핏하면 협박에, 걸핏하면 정치자금을 요구했다.”
▲ 정주영과 이병철 전경련 회의를 마치고 맨앞에 나란히 걸 어나오는 두 사람 | ||
“요즘(김대중 정권)도 마찬가지다. 98년 전경련을 방문했을 때 김우중 회장 등은 ‘(빅딜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고 잘될 것이며 정부나 대통령의 압력은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정부가 반도체 빅딜을 반대하던 대기업에 여신중단 압력을 가하고 그 재벌총수가 청와대에 불려가 (빅딜을) 강요받고 나와 밤새 통곡했다는 얘기가 당시 공공연히 돌았다. 과거 정주영 회장이 청문회장에서 ‘어쩔 수 없이 시류에 영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경제인이 시류에 영합할 수밖에 없게 한 정치권력도 나쁘지만 시류에 영합해 놓고 정치를 비하시킨 것도 옳지 않다.”
이와 관련, 한국재계사의 선명한 사례로, 5공 신군부 쿠데타 초기, 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이 치열하게 벌인, 두 거두(巨頭)간의 이른바 ‘고래싸움’이 거론된다.
다음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막에 관해 원로 언론인 손광식씨(전 문화일보 사장·현 삼성경제연구소 고문)가 밝히는 내용.
“12·12 쿠데타로 분위기가 삼엄하던 지난 80년 3월의 일이다. 당시 한국재계를 양분하고 있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 사이에는 언론을 매개로 한 일대 전쟁이 불붙었다.
발단은 삼성 계열인 중앙일보가 현대건설의 부실공사를 문제삼자, 이에 발끈한 현대의 정 회장이 각 신문사에 이병철 삼성회장과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과거 비리를 폭로하는 광고를 실으려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싸움은 삼성은 중앙, 현대는 동아 등 각자 인연을 맺고 있던 언론매체들을 매개로 한 폭로비방전의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을 뿐, 싸움의 실제 동기는 신군부와 삼성간 유착으로 현대가 소외될 지도 모른다는, 정 회장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신군부 출범 초반에는 삼성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신군부가 모시는 신현확 총리와 이 회장이 밀착되어 과도기 또는 ‘새 시대’의 재벌판도에 어떤 역학관계로 작용되고 자신과 현대는 소외당할지 모른다는 감을 정 회장은 가지고 있었다고 현대측 고위관계자가 나에게 밝혔다. 그러나, 국면은 83년 정 회장이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현대쪽으로 유리하게 바뀌어 갔다.”
손씨는 특히 83년에 정주영의 초청을 받아 울산 현대조선 영빈관에서 삼성 이 회장과 현대 정 회장간에 얽힌 ‘애증의 기류’의 일단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인데, 그때 정 회장이 술회했다는 내용.
“…우리 둘(이병철과 정주영) 사이가 서먹서먹해져 김용완 회장(경방·전 전경련회장)이 자리를 마련해 신라호텔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내가 쓴 ‘신문과 나’를 보았는지 ‘신문 비판하는 사람 큰일 난다’고 하더라. 그러더니 이번에는 김용완 회장 보고 ‘인촌(김성수)은 친일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김 회장이 얼굴이 벌개지면서 ‘무슨 소리요?’라고 하는거야. 그러자 이 회장은 ‘우리 취재하는 애들(도쿄특파원 등)이 정보를 입수해 증거물을 카피해 가지고 있다’고 다시 말하는 거야.
김용완씨는 인촌이라면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준 사람이자 처남 매부간이라 속으로 불쾌했을 거라. 이병철 회장은 얼른 화제를 바꾸어 자기는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고 신문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더니, 민관식이가 까불길래 신문(중앙일보) 방송(동양방송)으로 쳐 국회에 못나가게 했다고 하는 거야….”
당시 두 총수가 ‘정치와 최고권력’를 향한, 얼마나 민감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지, 그리고 권력의 부침과 한국재계 내부가 어떤 역학관계를 맺으며 흘러왔는지를 이 증언들은 잘 시사한다.
결국엔 최고 권력자이자 경영자인 대통령의 덕목이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이 연세대 최평길 교수(대통령학)의 견해. 그는 역사의 예를 인용, 한국의 대통령상에 대해 일침을 던진다.
“지난날과 오늘을 보면, 한국의 현 사정은 이제 검소한 대통령 이상의 순교자적 청렴성과 도덕성을 필요로 해야 한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거친 한국은 이제 대통령이 다음 세대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는 역사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역대 위대한 선진국 대통령들은 탁월한 리더십 외에 모두 도덕성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1위로 평가받는 링컨도, 독일 초대총리 아데나워도 시종일관 청렴결백한 지도자들이었다. 앞으로 대통령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고통분담의 국민호응과 경제난국 극복, 그리고 재도약을 위한 진정한 국력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권력층 내부에 거듭돼온 ‘부패 관행의 폐습’이 무엇보다 우선 척결돼야 하는 최대 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병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