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회장은 80년대 초반 정주영 당시 전경련회장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기도 | ||
그래도 그 위상이 가장 제고된 시기는 단연 정주영씨가 회장으로 일할 때로 꼽힌다. 정 회장의 ‘불도저식’ 경영스타일은 79년 숙원사업이었던 전경련회관 설립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고, 5공초기 군사 정권의 퇴임 압력을 물리쳐 낸 것도 그 상징적 예. 정 회장 재임기가 전경련 최고의 전성시대였다고 회상하는 관계자들이 아직 많은 것도 그런 연유다. 따라서 ‘전경련 시절 정주영 일화들’은 한국재계사의 진통 내용을 역설적으로 더욱 잘 보여준다.
재계 총리로 불리는 전경련 회장은 재계의 불화나 정치권과의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 때문에 서로가 맡기를 회피, 임기 2년의 선출 때마다 우여곡절을 겪는다. 정 회장의 취임경위도 마찬가지. 전경련 고위 관계자의 회고다. “4대 김용완 회장(경방 창업주)이 10년간 재임한 후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고사의 뜻을 밝히자 홍재선 회장(쌍용계열 금성방직 사장•전문경영인)과 정주영 회장에게 불똥이 튀었다. 정 회장이 완강히 반대, ‘오너‘가 아닌 홍 회장이 대타역을 잠시 맡았지만 결국 여론은 정 회장에게로 모아졌다.
`동네 이장도 하지 말라’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평소 별다른 직함을 갖지 않았던 정 회장이 반 강제로 회장직을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때 정 회장은 이를 피해 보기 위해 김용완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 회장을 회장으로 재선출하겠다’고 알렸더니 김 회장이 ‘누굴 죽이려느냐’며 전화를 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회장을 떠맡게 됐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전경련회장이란 자리는 그만큼 안팎으로부터의 시련이 간단없이 밀려오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시련으로 회자되는 5공 신군부시절, 정 회장 사임압력 경위는 그런 점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부문. 즉 ‘신군부 압력’은 단순한 권력 변환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경련회장으로서 자신의 대정부 자세에 대한 오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 회장의 술회 요지다. “77년 말쯤부터의 일이다. 정부는 그때 세제를 개선한다고 법인 기업에 대한 배당소득공제 제도를 철폐했다. 그런 조세 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최고 소득 세율 70%에 방위세 20%가 추가되어서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89%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이 안되는 법이었다. 더구나 국민의 자주권과 재산권에 소급해서 예상치 못했던 부담을 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있을 수 없는 폭거이며, 기본 질서를 유린하는 위헌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한 달 동안 거의 하루 걸러 회장단을 소집 동원하고 경제 4단체장까지 동참시켜, 부총리와 재무•상공•국세청장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가당찮은 법에 대해 토론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했다.
▲ 신군부의 집권으로 자연 긴장감이 조성됐던 지난 80년 어느날, 전경련 회의에서 정주영이 의제를 발표하고 있다. | ||
“80년대 초반 신군부 시절, 정주영 전경련회장은 당시 청년 기업인으로 각광을 받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을 불렀다.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기업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니야.’ 정 회장은 당시 ‘전재산 사회 환원’ 발언 등 여론과 신군부의 압력을 의식한 김 회장의 ‘튀는 행동’에 대해 무척 불쾌해했다. 두 사람의 악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정 회장이 애지중지하던 현대양행이 신군부의 서슬퍼런 압력 속에 대우에 넘어갈 때였다. 정 회장은 사석에서 ‘내 사업은 모두 내가 직접 말뚝을 박고 시작한 것인데, 그 젊은 친구(김 회장)는 정치권에 기대어 남의 기업을 인수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김 회장에 대한 원념(怨念)을 곧잘 드러냈다.” 또한 권력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권력변환기에는 정부의 재벌정책을 둘러싼 재계 내부 이해관계 갈등이 특히 증폭되곤 했다는 얘기.
다음은 그 케이스 중의 하나로 정 회장과 한진 조중훈 회장간의 갈등에 대해 또다른 재계인사가 전하고 있는 일화다. “70년대 말 전경련 회장단회의 때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인 속칭 ‘두부공장 파동’은 아직도 재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당시에도 대기업의 선단식 경영, 중소기업 고유업종 침해에 관해 정부의 제재가 있었는데 정 회장이 조회장을 겨냥, ‘두부공장은 중소 기업들이 할 사업영역인데 왜 대기업이 하느냐’고 말하자 비슷한 연배의 조 회장이 ‘당신은 면장갑ㆍ고무장갑까지 만들면서(당시 현대중공업 근로자용 장갑을 현대가 직접 생산한 것을 비유) 누구에게 하라 마라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당시 조 회장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회의 도중 자리에서 일어선 뒤 자신의 승용차를 기다리지도 않고 택시를 잡아탄 채 전경련 회관을 떠났다는 후문이 나돌았다.”
권력의 입김으로 인한 이해득실을 둘러싸고 발생하곤 했던, 이런 류의 재계 내부 알력에 대해 경제전문 언론인 L씨(54)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경단련은 우리나라의 전경련과 성격은 비슷하지만 위상과 기능은 판이하다. 그 차이는 제목소리 내기에서 비롯된다. 경단련은 정경유착이란 비판을 똑같이 받고는 있지만, 당당히 제목소리를 내면서 재계를 결속시키고 경제대국 일본을 유지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국민의 신뢰도 높다. 이에 비하면 한국 전경련의 위상은 참으로 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정권교체기에 책무가 막중한데도 모두가 입을 다물곤 했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혹독했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3공, 5공시절 전경련 회장을 지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때 ‘노’라고 말하며 뱃심을 보였지만 그도 결국엔 권력앞에 어쩔 수 없었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도 한때 ‘업종전문화 시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한마디 했다가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이런 과정으로 왔으니, 어떻게 재계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최근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또다른 전경련 관계 인사의 진단.
“최근 김홍업씨 문제로 대기업들이 거액의 돈을 건넨 사실이 밝혀지자 전경련은 ‘부당한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공식 결의한지 얼마되지도 않아 악재가 터져 무척 난감한 표정들이 되었다. 전경련측은 ‘투명경영 의지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고 걱정했다. 특히 연루된 현대측 관계자도 ‘드러난 16억원이 한꺼번에 지급된 것도 아니고 10여 차례 나눠서 지급된 것인 만큼 정주영 회장의 개인 돈이 아니었겠느냐’며 기업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분명히 정치권과 재계의 관계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 불미스런 사건 탓에 많은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정경유착의 악습이 여전하다고 믿게 되었다는 주장들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기업은 기업대로 투명경영을 재다짐하는 계기가 되고,정치권은 정치권대로 기업에 손을 벌리지 않는 새로운 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 인사들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이병도(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