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2년 한 행사장에서 마주친 YS와 정주영 | ||
문민정부 초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맡아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만난 자리. 그러나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YS는 대선 당시 통일국민당 대통령후보로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 후보가 돈을 엄청나게 뿌리면서 나를 몹시 애먹였다. 재벌총수가 대통령후보가 돼서는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선거가 끝난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정씨에 대한 YS의 감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YS와 CY(정주영 회장의 애칭).
정계와 재계의 양대 거목인 두 사람의 인연은 92년 2월 CY가 국민당을 창당하고 정계에 입문함으로써 악연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 현대그룹에 대한 사실상의 ‘전면적 탄압’이 시작됐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벌어진 이같은 기류의 경제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비단 문민정권하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자와 재벌의 정치적, 사적 역학관계가 얼마나 한국의 대기업 경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는지를 잘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진단. 그 추이의 실제 진상을 현대그룹 변천사를 중심으로 거슬러 올라보자.
먼저, 5공화국 시절의 이야기. 현대측 주장이다. “현대는 울산조선소라는 중공업 제작 기지를 활용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대형 공사들을 효과적으로 완수해내면서, 해외 건설과 중공업 제작 역량이 서로 연계해 발전했다.
건설, 자동차, 조선업을 모태로 하는 전형적인 관련 다각화의 과정을 거쳐 이뤄진 ‘현대’의 중공업 체제는 자생•자주적 국제규모의 구축에 성공해 가고 있었다. 그 결과로 ‘현대중공업’은 국내외의 불경기에도 77년을 기점으로 매출액이 78년 28.1%, 79년 8.8%, 80년 55.75%, 81년 57%의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충분한 경험과 기술력을 기초로 관련 다각화와 해외 수요를 기준으로 중화학 체제의 독자발전에 성공한 현대가 국내 중화학 공업시장의 경쟁력 미숙과 난립을 이유로, 도매금으로 5공 신군부의 중화학 투자 조정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논리가 통하지 않는 암흑시대에서 시행된 강제적 조정으로 인해 발전 설비 사업을 포기해야 했던 현대는, 그나마‘현대’로 일원화되기로 했던 ‘자동차’까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다원화되는 바람에 일관성 없는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된 정주영 본인의 소회. “나는 어떤 분야건 자유 시장경쟁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신봉하는 사람이다. 나는 5공 당시 국내 시장 규모만 갖고 중복 과잉을 판단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나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은 그 후, 자동차, 전자, 석유, 화학 산업의 자유 경쟁 체제가 수출 산업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한다. 5공화국 동안 어렵지 않았을 때가 별로 기업에 없었지만 창업자였던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푼 못 건지고 창원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는 전쟁 이상의 어려운 고난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전쟁만큼의 고난은 아니었지만 전혀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진 권력이라는 칼날 아래 기업을 하면서 정변 때마다, 정권 교체 때마다 그때그때 겪은 고난과 고통도 쉽지는 않았다.
” 6공화국은 어떤가. 다음은 전문가들의 견해. “시장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정상적 경쟁을 통한 부의 축적이라는 가치관이 확립돼야 한다. 그런데 6공 5년동안 정경유착 등을 통한 부정축재가 만연됐고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좌절감과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노 대통령이 정치 경제 등 국정 제분야에 대한 문제의식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는 부정부패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제도화돼 갔다. 부정부패가 제도화되니 정경유착은 더욱 심화되고 경제사정은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 이런 구조에서 공정한 경쟁의 시장경제가 제대로 성립될 수 있었겠는가.” (홍원탁 교수, 서울대 경제학) “정주영씨의 정치참여 배경에는 노 대통령의 리더십 빈곤도 작용했다고 본다.
민주화되고 재벌의 물적 토대가 커지면 재벌에 대한 관리방식도 달라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계속 비시장경제적 권위주의식으로 통제하려 했다. 이 같은 통제에 정주영씨가 반발, 정치자금 제공사실을 폭로하고 노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정치참여를 선언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김호진 교수, 고려대 정치학) YS 문민정권기도 되돌아 보자.
현대와 정주영에겐, 이 시기는 극심한 시련기로 회자된다. 정권 출범 후 정주영씨는 물론 정몽헌 박세용 음용기 이병규씨등 20여 명의 핵심측근들이 구속됐으며 입건된 사람만도 1백명이 넘었다. 전례없는 자금압박도 뒤따랐다. 당시 현대그룹에 대한 경제제재의 유형은 크게 세가지.
▲산업은행 등의 설비자금 대출중단
▲해외주식예탁증서(DR)발행불허
▲기업공개와 장외시장등록 불허가 그것. 제재수단은 금융부문에 집중돼 있었다.
제재주체는 재무부. 한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 임원은 이른바 민주화 시대에 권력이 어떻게 ‘시장경제’에 기술적으로 침투 왜곡할 수 있는 지를, 문민정권 당시의 ‘현대 사례‘를 인용, 이렇게 증언한다. “김영삼 정권때 움츠린 현대가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리도 만무하니 산업정책으로는 크게 괴롭힐 것이 없다.
세법이나 공정거래법으로 다스리면 너무 표시가 난다. 반면 금융제재는 밖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조이는 고통은 세다는 특징이 있다. 속으로 골병드는 것이다. 금융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는 사람이 현대 제재를 기획한 것이 분명하다.”
현대는 산업은행에
▲92년 6천5백23억원
▲93년 8천3백67억원
▲94년 1조5천4백10억원
의 시설자금 대출을 신청했으나 한 푼도 받지못했다는 것. 설비투자를 못하면서 현대그룹은 서서히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정주영씨가 그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에 관해 토로한 극단적 심회.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더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소도 말도 웃을 후진국적 정치폭력이 백주에 횡행했던 지난 시절이 어이없을 뿐이다.
” 심현영(청구부회장) 전 현대그룹종합기획실장도 “YS정권 이후 남들은 교실에서 ‘신경제’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우리만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정작 김 대통령이 내놓고 ‘현대그룹을 죽이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당시 고위 관료들의 일관된 증언.
김영수 전 민정수석은 “김 대통령은 재임기간에 절대 현대를 거론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감(私感)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했다. 또 이경식 전 부총리는 “아랫사람들이 받들어 (제재를) 한 거다. 대통령의 심기를 미리 읽은 거다.
김 대통령은 개별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대 제재와 시장원리의 왜곡은 김 대통령의 이른바 ‘분위기 통치’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특정 기업을 뒷면에서 봐주거나 때리는, 이런 유형의 ‘교묘한’ 시장경제 왜곡 통치행위는 김대중 권력 하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이 많은 재계 소식통들의 지적이다. 이병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