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6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검찰이 이들을 불러 조사한 것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의혹 문건 410개의 목록 중 ‘민변대응전략’, ‘상고법원 입법추진관련 민변 대응전략’ 등이 포함됐기 때문. 검찰은 이에 앞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에 반대했던 하창우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피해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를 마쳤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하창우 당시 변협 회장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한 뒤, 이를 특정 매체를 통해 알리는 상황까지 검토한 것으로 문건 상 드러난 바 있다.
하지만 법조계는 이런 기초적인 사실보다, 검찰 손에 넘어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PC 등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인데, 양승태 전 원장에게 보고된 내용들 중에는 기존에 법원도 살펴보지 못했던 ‘상고법원 입법추진 대가성 로비’ 정황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당시 국회 등에서 여러 사건에 대해 의견을 전달한 게 문건 이상의 형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 PC에 한 건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른 형태의 로비로 사건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PC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 수사 방향이 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다. 비록 디가우징이 됐지만, 일부라도 복구가 될 경우 해당 내용에 따라 사법권 남용 사건이 완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 검찰 역시 이를 위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사용한 PC의 하드디스크에 대한 복구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현재 이들의 PC 하드디스크는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복구 불가능토록 삭제하는 ‘디가우징’으로 영구 삭제됐는데, 검찰은 내부 전문가는 물론 외부 전문가 등을 통해 복구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법원은 초조한 분위기다. “나올 게 없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적지 않지만 “검찰에 넘긴 게 잘못한 선택”이라는 비판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위 법관은 “우리도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얘기를 들은 결과, ‘문제는 있지만 죄가 될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며 “우리 내부적으로도 개인 정보 관련 자료들을 동의 없이 열어볼 수 있느냐를 놓고 시끄러웠는데 검찰이 다소 무리하게 요구를 하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달 열린 법원장회의에서도 “무리하게 잘못한 것은 있지만, 죄가 될 정도는 아니”라는 게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 및 전국 법원장들이 6월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전국 법원장 간담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하지만 검찰의 반응은 단호하다. 법원이 시키는 대로 수사를 할 의무가 없다는 일관된 입장이다. 사건 관련 검찰 관계자는 “김명수 원장 등이 시키는 대로 수사를 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사건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다 보니 기본적인 뒷조사 외에도 상고법원 입법 관련 국회나 언론 로비 등의 정황이 있어보여 수사를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했다.
검찰은 오는 13일로 예정된 차장·부장검사급 인사가 이뤄지면 수사에 본격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수사의 동력 유지를 위해 현재 사건을 수사 중인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는 물론, 신자용 특수1부 부장검사를 유임시키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인사에 밝은 한 관계자는 ”유임된 윤석열 지검장은 지금 수사팀을 최대한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며 ”인사가 확정되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물론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수사 및 언론 플레이에 법원보다 특화된’ 검찰에 당했다는 평이 법원 내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나 시작부터 디가우징된 양승태 전 원장 PC에 대한 수사 협조를 놓고, 법원이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자아성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검찰이 애초에 우리가 원하는 영역만 수사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 자체가 순진한 생각“이라며 ”검찰이 어떻게 수사를 할지 미리 알고 수사 협조 등을 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실제 법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용한 PC를 넘기는 과정에서,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찰이 법원이 협조하겠다고 밝힌 뒷조사 등 사법권 남용 의혹 외에 자료들을 요구하자 이를 예상하지 못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내부 의견을 모아 결정하겠다“고 입장을 내놓은 뒤, ”법원 내부 규정에 따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PC를 디가우징했다“고 해명하기 급급했다. 그럼에도 넘기지 않으려다가, ”우리가 직접 확인하겠다“는 검찰에게 PC를 넘겨주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여론의 지지도 잃고 내부 의견도 뿔뿔이 나뉘었다는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내부적으로도 수사에 어느 정도 협조해야 하는지를 놓고, 의견이 나뉘었다“며 “김명수 대법원장이 규정에 따라 디가우징했다고 설명했을 때는 사실 검찰이나 언론도 있지만, 내부 판사들을 상대로 ‘문제가 될 소지가 없다’고 해명하는 느낌이 강해 뭔가 기분이 묘했다”고 토로했다. 앞선 고위 법관은 “결국 검찰이 어느 정도 수사하느냐에 달렸겠지만 그동안 ‘재판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켜온 우리 법원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해졌다”며 “판사들 중 재판에 대해 법원행정처 등 제3자의 개입을 받은 적이 있던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없을 텐데 그런 부분을 알면서도 검찰 수사를 승낙한 김명수 원장의 판단 미스”라고 안타까워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