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27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공모에서 유력 후보로 꼽히던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사장을 포함한 3명의 후보가 모두 탈락하면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민연금의 의결권·주주권 행사를 최종적으로 책임질 CIO의 부재가 1년 반이 넘도록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와대가 CIO 인사 과정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민연금은 정치적 외풍에 휩싸이기도 했다. CIO 면접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관련한 질문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인선 과정에 결함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민연금은 지난 10일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한 우려와 도입 연기설을 일축하며 예정대로 이를 시행키로 결정했다. 국민연금을 관리·감독하는 복지부는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과 관련해 오는 17일 공청회를 열고 세부지침 등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안 심의·의결을 오는 26일 차질 없이 진행할 예정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지침으로 기업의 위험관리와 경영투명성 제고, 투자자 이익 증진 등을 목표로 한다. 작년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298곳. 국내 주식시장에 투입한 금액만 약 131조 원에 이른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 여파가 클 수밖에 없다.
시장에선 국민연금이 독립성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CIO 자리에는 정권 입맛에 맞는 인물이 오른 경우가 빈번했다. 이와 관련, 정치적 외풍을 차단하지 못하는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구조가 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임명하기 때문이다. CIO 선임은 기금이사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복지부 장관의 승인 하에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임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으로 기업경영을 통제하는 일명 ‘연금사회주의’, ‘관치경영’ 우려도 나온다. 최근 복지부는 이를 의식해 스튜어드십 코드 운용지침 초안에서 투자회사의 임원 선임·해임, 의결권 행사 위임장 대결, 회사의 정관 변경 등 자본시장법 시행령상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내용은 제외키로 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우려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초안에서 경영참여 항목이 빠지긴 했지만 향후 내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데다 내부적 개선이 없는 이상 국민연금의 기존 방향성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며 “지금의 국민연금은 기업을 견제한다기보다 통제하는 측면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실무자가 충분치 않아 기업 안건을 심사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은숙 기자
기금운용본부 실무자가 충분치 않아 기업 안건을 심사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의결권·주주권 행사 관련 실무를 담당하는 운용전략실 책임투자팀 인력은 7명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 기업은 770여 개가 넘는다. 한 사람이 수십 개의 기업 이슈를 처리하는 셈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CIO를 포함한 임원진 9명 중 4명도 공석 상태지만 해외대출실장직과 주식운용실장직은 현재 직무대리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위원회의 주요 안건에 대한 논의·판단을 지원하는 의결권전문위도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역부족이란 평가가 나온다. 의결권전문위 인원은 정부·기업·근로자 등이 각각 추천한 민간 전문가 9명에 그친다. 더욱이 대부분 위원이 교수 등의 본업을 가지고 있어 기업 이슈를 검토할 시간이 충분치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이 최근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전문성과 독립성을 제고하는 차원에서 의결권 절반을 외부 위탁운용사 등에 넘긴다고 밝혔지만, 운용사들이 국민연금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라며 “결국 국민연금 내부적 손질을 통한 제도 운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해외 국가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켜 운용할 수 있게 된 건 시행 주체들이 장기간에 걸쳐 시장에서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라며 “잡음이 계속 나오는 상황에선 도입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해외는 어떻게 운용하나? 정부 입김 원천 봉쇄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0년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일본·캐나다 등 20개 국가에서 도입해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고 있다. 해외 국가들은 기금운용공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나름 자구책을 강구했다. 국민연금이 벤치마킹한 캐나다의 경우 기금운용공사인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에 연기금 운용을 독립적으로 맡기고 이들이 의결권을 행사토록 한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는 CPPIB법에 따라 정부 정책 등과 거리를 두고 연금 가입자 이익을 우선한다. 일본 기금운용공사는 국민연금과 비슷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이 보건복지부의 관리·감독을 받듯 일본 공적연금(GPIF)은 후생노동성의 통제를 받고 있다. 다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주주권·의결권 행사를 외부 운용사에 100% 위탁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일본의 방식을 참고해 의결권을 전부 외부에 맡기고 국민연금은 이를 감독·감시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네덜란드공적연금(ABP)은 민간 자회사인 자산운용공사(APG)를 설립해 기금 운용을 따로 맡기고 있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해외처럼 우리나라도 기금운용본부의 의사결정 독립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여건 조성과 지배구조 개편으로 정치적 외풍 등을 차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