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수험생들이 은밀한 거래를 제안받은 시점은 지난 7월 16일. 자신을 출제문제를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A 씨는 수험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1000만~2000만 원대의 금전적 대가를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꽤 상세했다. 지역별로 한두 명에게만 문제를 넘길 예정이며 시험 이후 자신이 제공한 문제가 출제됐을 때만 돈을 지급하면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상황을 인지한 우정사업본부가 7월 17일 수험생들의 주의를 당부하는 공고를 게시했지만 비슷한 제안을 받았다는 증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쏟아지며 파문이 일었다. 특히 우정사업본부 9급 공무원 채용 시험은 보통 2년마다 한 번씩 치러져 경쟁률이 치열한 탓에 수험생들의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우정사업본부는 “시험을 무기한 연기하는 것은 의혹을 증폭시키고 수험생들의 시험에 대한 불신과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판단했다”며 예정된 7월 21일 시험을 진행했다.
다만 우정사업본부는 혹시 모를 유출 가능성을 고려해 시험을 이틀 앞둔 7월 19일 시험문제를 전면 교체했다. 대부분의 공무원 시험과 마찬가지로 우정 9급 필기시험 역시 예비문제가 있었던 것. 우정사업본부의 한 관계자는 “원래 출제위원들이 문제은행 식으로 출제할 문제의 몇 배수에 달하는 문제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고 설명했다.
일단 우정사업본부는 경찰에 긴급수사를 요청하는 한편 출제위원, 운영위원 등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자체 조사를 벌인 상태다. 현재까지 본부 내부적으로는 시험 문제가 실제 유출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본부의 한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내부 관계자가 유출한 흔적은 전혀 찾지 못했다. 시험 전부터 출제위원은 물론 편집·인쇄·행정 등 모든 관련자가 함께 합숙하고 시험이 끝나면 함께 나온다”며 “보안시설 내에서 외부 보안업체의 감시 아래 휴대전화, 컴퓨터 등 모든 통신수단 이용도 차단된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시험문제 거래를 제안한 피의자는 특정된 것으로 확인된다. 충남 세종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거래를 제안한 피의자 1명이 특정됐으며 현재 유출 혐의에 대해 조사 중이다. 우정사업본부와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라며 “조사 시작단계여서 아직 실제로 수험생과 문제를 거래한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으나 확인 중에 있다”고 말했다.
시험이 진행된 이후에도 수험생들 사이에서 시험문제 유출 의혹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7월 2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번 문제 유출 의혹에 대해 책임을 요구하는 청원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7월 16일에 상황을 인지한 우정사업본부가 이틀 뒤에야 경찰 수사를 의뢰한 것은 너무 안일한 대처라는 지적도 나온다. 본부 관계자는 “최초 글이 7월 16일 저녁에 올라왔고, 다음날 오전 본부가 인지하고 바로 수험생들에게 유의하라는 공고를 올렸다. 이후 내부 상황을 파악한 뒤 18일 오전에 바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정부기관이 주관하는 신입직원 채용 과정에서 시험문제가 유출되는 사건은 꾸준히 발생해 왔다. 지난 2016년 지역인재 7급 국가공무원 채용 시험에 응시한 송 아무개 씨는 자신의 학교가 시중 학원에서 제작한 모의고사로 지역인재 7급 국가공무원 추천 대상자를 뽑는다는 사실을 알고 해당 학원에 침입해 시험지와 답안지를 훔쳤다. 이후 시험자격을 얻은 송 씨는 인사혁신처 사무실에 침입해 합격자와 성적을 조작하기도 했다.
경찰은 우정사업본부가 실제로 출제 관계자들을 철저히 관리·감독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침이다. 우정 9급(계리) 공무원 공개경쟁채용 필기시험은 일반적인 행정적 공무원과 달리 인사혁신처가 아닌 지방 우정청이 시행한다.
앞의 세종경찰서 관계자는 “허무맹랑한 사기극일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할 계획“이라며 ”우정사업본부에서 실제로 시험 관계자들이 합숙했는지 여부 등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A 씨가 실제 문제를 유출했는지에 따라 징계가 달라지겠지만, 처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혐의를 조사해봐야겠지만 피의자에 대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사기죄 등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공공기관 시험은 더욱 심각…출제자 격리 규정도 없어 정부기관이 아닌 공공기관의 시험 문제 출제 및 관리 과정은 보다 느슨한 것으로 확인된다. 무엇보다 인사혁신처가 주관 및 관리하는 정부기관 공무원 채용 시험과 달리 공공기관의 채용시험 문제 출제 및 관리 과정은 순전히 일선 기관들의 몫이다. 대부분 공공기관의 시험 문제 출제자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일선 기관이 아무리 관리·감독을 철저히 한다고 해도 유출 위험은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 5월에는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의 전 사무총장이 친분이 있는 기자에게 신입직원 채용 논술시험 문제와 모범답안을 건네다 적발되기도 했다. 청주시의 한 관계자는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의 경우) 시험을 관리하는 내부 방침이 있겠지만, 명문화된 규정이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시험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체적으로 철저히 관리 감독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며 “시험 관련자들이 합숙까지 하며 시험문제 유출을 관리하는 일반적인 공무원 시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