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준선 기자
양승태 대법원의 지상과제는 상고법원 설치였다. 대법원까지 오는 소송 중 일부를 상고법원으로 보내 대법관 업무량을 줄여주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실세 정치인들은 상고법원 설치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2014년 12월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긴 했지만 논란 끝에 통과되지 못했다. 언론에서도 부정적 기사가 주를 이뤘다.
박 전 대통령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의 청와대 회동(2015년 8월 6일)에서 “상고법관 임명에 민주적 정당성 결여 문제가 있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한 친박 의원은 “박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상고법원을 둘 경우 사법부에 대한 장악력이 낮아진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법원 쪽이 (상고법원) 판사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헌법 제104조 3항에 따르면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상고법원이 설치될 경우 판사에 대한 임명권은 대법원장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법원은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판사를 지명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후보자 선정을 청와대가 주도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우회적으로 ‘꼼수’를 동원하려 했던 셈이다.
대법원의 세 차례 자체 조사 결과 드러난 법원행정처 작성 문건을 살펴보면 양승태 대법원이 박 전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던 흔적은 역력하다. 문건엔 ‘BH 반감을 없앨 수 있는 새로운 임명 절차 제시’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등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한 판사는 “이 문건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판결까지 정권의 눈치를 보겠다는 것 아니냐”면서 “매우 굴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끝내 상고법원 설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비롯한 핵심 참모들의 강한 반대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고법원에 대한 통제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대법원 안팎에선 우 전 수석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었다고 한다.
상고법원 설치가 벽에 부딪히자 대법원장 직속 정예부대라고 할 수 있는 법원행정처가 나섰다. 사법 농단 사건의 발단이다.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을 비롯해 법조계 인사들이 은밀한 로비에 나선 것도 이 무렵부터다. 특히 그 대상은 법사위 소속 의원들 및 여야 핵심 의원들에게로 집중됐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선 우선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까닭에서다. 당시 법사위 소속이었던 한 의원의 귀띔이다.
“몇몇 판사들이 여의도에 상주하다시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심과 저녁 약속이 꽉 차 있더라. 기업이나 사정기관에서 정보업무를 하는 인력과 흡사해 보였다. 법원 내에서 소위 잘나가는 에이스들로 불리는 판사들이었다. 낮부터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자주 마신 기억이 있다. 나뿐 아니라 다른 법사위원들과도 자주 만났다고 들었다. 대놓고는 아니었지만 상고법원 설치의 필요성과 관련해서 말하곤 했었다.”
실제 법원 내부에서도 사법부 최고위층의 ‘밀명’을 받은 일부 판사들과 변호사가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입법 로비를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한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주도로 국회의원들과 친분이 있는 판사 또는 변호사를 섭외해 ‘맨투맨’으로 접촉했다”면서 “판사들이 그런 식의 활동을 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내부적으로도 곱지 않은 시선들이 있었다”라고 전했다.
법원 로비망은 정치권뿐 아니라 청와대와 언론 등으로까지 뻗쳤던 것으로 보인다. 학연과 지연 등을 활용해 상고법원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에 따르면 사법 농단 핵심 인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에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정권 실세인 친박계를 포함한 특정 정치인들 및 언론사와 관련된 재판을 관리했던 내용이다.
앞서 대법원 자체 조사 결과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거래 의혹이 대두된 바 있다. 대법원이 KTX 해고승무원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사건, 이석기 내란음모 재판 등을 진행하면서 정치적 고려를 했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대법원은 정치인들이 연루된 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소송, 특정 언론사의 명예훼손 소송 등을 일일이 체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판결을 로비의 수단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정치인과 언론사의 판결을 법원 수뇌부가 별도로 보고받았다는 것은 재판을 갖고 거래를 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내 고등학교 후배라는 판사가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해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취재를 위해 접촉한 친박계 전·현직 의원들은 ‘성완종 사건’과 관련해 판사들로부터 의미 있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 전직 의원의 말이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집중적으로 정치인들을 관리했던 때가 2015년 여름 무렵이었다. 그때는 ‘성완종 리스트’가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그런데 사법부 측 인사들이 ‘아무 걱정 말라’ ‘재판은 해보나 마나’ ‘영장발부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었다. 우리 쪽에겐 다행스런 말이었지만 아직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판사들이 그런 말을 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