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3일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참석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임준선 기자
검찰은 “이 사건은 도지사와 수행비서라는 극도의 비대칭적 관계를 이용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굴복시킨, 명백한 권력형 성범죄”라고 지적하며 “그러나 안 전 지사는 여전히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주장하며 사과를 하지 않는 등 죄질이 나쁘다”고 구형 이유를 밝혔다.
이날 재판에는 피해자 김지은 전 충남도 정무비서(33)도 참석해 직접 피해자 진술을 이어갔다. 그는 안 전 지사 측의 증인 공세와 2차 가해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병원 신세를 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A4용지 15장 분량으로 45분간 이어진 그의 피해자 진술 곳곳에서는 피해자 본인은 물론, 방청객들 사이에서도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김 씨는 안 전 지사를 가리켜 “오랜 시간 떠받들려져 조직 내에서 제왕적 리더로, 추앙받는 종교인처럼 살아온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안 전 지사의 대선 캠프가 ‘(권력형 성범죄가 벌어질 정도로) 강압적이지 않은 민주적인 조직’이라고 항변했던 안 전 지사 증인들의 증언에 정면 반박하며 “피고인의 측근들은 ‘피고인 정도 되는 분을 모시는 너희들은 영광으로 알아라’라며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 민주적인 조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안 전 지사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도 이어졌다. 김 씨는 “어쩌면 그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라며 “그는 제게 ‘나는 어떤 여자와도 잘 수 있다’ ‘모든 여자들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섹스가 좋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니?’라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건 왕자병이 아니라 치료받지 못한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를 숨기지 못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씨는 그런 피고인에게 단 한 번도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았으며 “제게 있어서 피고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사님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런 안 전 지사가 자신을 네 번이나 유린하는 과정에서 애써 잊으려는 자신에게 “혹시 너 미투할 거냐?”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김 씨의 오전 피해자 진술이 끝나고 오후에는 안 전 지사의 반격이 이어졌다. 검찰 구형이 내려진 직후 약 15분간 휴정한 뒤 안 전 지사의 변호인은 “기습 추행은 없었으며, 간음은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김 씨가 허위진술을 하고 있고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안 전 지사의 변호인단은 이 사건이 단순히 김 씨의 방송 출연으로 말미암아 명확한 사실 확인 없이 ‘김 씨의 주장이 진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소비돼 왔다는 점을 꼬집었다. 변호인은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 김 씨가 방송에 출연해 피해를 호소했고 이로써 일방적인 주장이 전달됐다”며 “전체적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부족하고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한 증명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며 무죄 선고를 요청했다.
안 전 지사 측이 마지막으로 들고 나온 카드는 피해자 김 씨의 거절 의사 개진 여부다. 설사 안 전 지사의 지위나 권력으로 김 씨가 간접적인 압박을 느꼈다 하더라도 행위에서 거절이 있었는지, 안 전 지사가 이를 제압하기 위해 행사한 위력이 있었는지 여부가 드러나지 않았거나 애초에 없었다는 것.
지난 7월 26일 오전 망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2차피해 - 안희정 전 지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이종현 기자
피고인 변호인단이 이와 같은 주장을 내세우는 데에는 앞선 안 전 지사 측 증인들의 증언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앞선 재판에서 안 전 지사 측의 증인들은 김 씨에 대해 “새벽 4시에 부부 침실로 침입했다” “‘마누라 비서’라고 불릴 정도로 안 전 지사를 보필했다” “안 전 지사와 함께 간 해외 출장 당시 남녀 애정과 관련한 이야기를 했다” 등의 증언을 이어갔던 바 있다.
이로써 김 씨에게 강압적인 성관계의 피해자가 아닌 “안 전 지사에게 맹목적인 애정을 가졌던 불륜 여성”이라는 프레임 공격이 이어졌다. 당시 김 씨의 법률 지원을 돕던 여성단체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측은 “재판이 희대의 삼류 찌라시 기사의 생산지로 돌변하고 있다. 유력 정치인의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기 위해 나선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조각난 가상의 모습, 가상의 스토리가 도를 넘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안 전 지사는 이날 피고인 최후 진술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이 지경이 된 것에 죄송하다”며 “이 자리를 빌어 국민 여러분과 충남도민 여러분, 저를 사랑해 주신 모든 분께 미안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통을 겪은 고소인(김 씨)과 변호사, 인권단체 여러분께도 죄송하다. 제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 지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인권을 빼앗나. 지휘 고하를 떠나 제가 지닌 지위를 가지고 위력을 행사한 바가 없다”고 위력에 의한 성관계 혐의를 전면 부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 씨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고소인과의 관계 지속에 도지사로서 가장으로서 갈등을 느꼈고 고소인에게 미안했다”고 덧붙였다. 안 전 지사는 지난 3월 6일 사건 공론화 당시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김 씨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인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사회적·도덕적 책임은 회피하지 않겠다”면서도 “법적 책임은 (재판부가) 잘 판단해 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 전 지사의 선고 공판은 8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열린다. 김 씨의 재판을 돕고 있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은 7월 30일까지 안 전 지사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보낸다는 방침을 밝혔다. 안 전 지사는 지난해 7월 29일부터 올해 2월 25일까지 김 씨를 상대로 상습적인 강제추행·성폭행 등 혐의로 지난 4월 11일 불구속 기소된 바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