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라일리 웨스턴으로 이름을 바꾼 후 작가에 도전했다. 바꾼 건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웨스턴은 자신을 1979년생이라고 했고, 자기 세대의 이야기라며 ‘펠리시티’의 대본을 써서 에이전시인 ‘유나이티드 탤런트’의 눈에 띄었다. ‘펠리시티’의 제작사인 터치스톤은 디즈니의 자회사. 웨스턴은 단숨에 할리우드의 중심으로 뛰어든 셈이었으며, 디즈니는 그녀를 신데렐라로 만들었다.
아직 19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며 ‘펠리시티’에 틴에이저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담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라일리 웨스턴은 저널에 의해 ‘분더킨트’, 즉 ‘젊은 천재’로 불리기 시작했다. 152센티미터에 42킬로그램의 작은 체구와 동안, 청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의 캐주얼한 모습. 웨스턴은 충분히 10대처럼 보였고, ‘펠리시티’의 스태프들은 촬영 기간에 그녀의 19번째 생일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그녀는 상냥했고 매력적이었으며, 약간은 가난해 보였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당시 함께했던 디즈니 간부의 평가였다.
라일리의 명성이 정점에 달한 건 1998년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연예 매거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매년 선정하는 ‘가장 창조적인 엔터테이너 100인’ 명단에 라일리 웨스턴을 넣었다. “많은 면에서 나는 펠리시티와 닮았죠. 우리 세대를 현실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 게 제 꿈이에요.” 당시 웨스턴의 인터뷰였다. 이후 디즈니는 50만 달러짜리 딜을 제안했다. 무명 배우에서 유명 작가로. 그녀는 성공의 문턱에 서 있었다. 적어도 TV 연예 프로그램인 ‘엔터테인먼트 투나잇’의 보도가 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창조적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힌 후 얼마 되지 않아, 라일리 웨스턴이 사실은 1979년생이 아니라는 폭로 기사가 나왔다. 그녀의 오랜 친구가, 웨스턴이 더 이상 세상을 속이는 걸 견디지 못하고 증언하고 만 것이다. 나이만 속인 게 아니었다. 본명은 킴벌리 크레이머가 아니라 킴벌리 시맨이었다. 그녀는 스토커 때문에 계속 이름을 바꾸었다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매니저인 브래드 섹스톤과는 잠깐 결혼 생활을 했지만 곧 이혼했다고 말했는데, 당시까지도 그들은 부부 관계였다.
모든 것이 드러나자, 결국 라일리 웨스턴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과오를 인정했다. 그녀는 1979년생이 아니라 1966년생이었고, 1984년에 하이스쿨을 졸업한 후 뉴욕에서 LA로 왔으며, 10년 동안 배우로 성공하길 꿈꾸었으나 실패했고, 서른 살이 넘었을 때 ‘펠리시티’의 작가로 첫 기회를 잡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를 속였을 뿐, 그 외에 어떤 나쁜 의도도 있지 않았다며 변명했다. 하지만 에이전시는 계약을 해지했고, 디즈니와의 딜도 무산되었으며, 당연히 ‘펠리시티’ 작가진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흥미로운 건 라일리 웨스턴의 사건은 할리우드에게 어떤 반성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득실대는 할리우드는 왜 열세 살이나 나이를 속였던 웨스턴에게 속았을까? 저널은 ‘젊음’을 무자비하게 소비하는 미국 연예 산업의 잔인함을 지적했다. 그것은 어린 천재를 발굴해 일찌감치 스타로 만들려는 강박이기도 했다. 어쩌면 라일리 웨스턴은 그 틈새를 노린 셈이며, ‘펠리시티’의 프로듀서는 “젊은 주인공과 동년배의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콘셉트에 매몰되어 웨스턴의 진짜 나이 따위는 묻지도 않았던 것이다. 웨스턴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할리우드가 아닌 곳에서 일자리를 얻었다면, 누가 내 나이 따위에 신경이나 썼겠는가.”
그렇다면 라일리 웨스턴은 알량한 재주로 업계를 속인 사기꾼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녀의 글쓰기 재능은 2006년 첫 소설 ‘내가 가기 전에’ 출간으로 이어졌고, 이 책은 인디펜던트 퍼블리셔 어워즈에서 ‘올해의 스토리텔러’ 상을 수상했고, 뉴욕 북 페스티벌에선 베스트 픽션으로 꼽혔다. 현재는 직접 주연을 맡을 영화화를 위해 각색 중이다. 그리고 2009년엔 가수로서 첫 싱글을 발표했으며 성우로도 활동 중이다. 어쩌면 라일리 웨스턴은 ‘나이’라는 벽과 무관했던, 여러 분야에서 성취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였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