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행정처’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196개의 파일을 공개했다. 해당 파일에는 당시 행정처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및 하야 가능성 등에 대해 검토한 자료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그 중에도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상고법원’ 관련 문건들이었다. ▼상고법원 입법 추진 동력 boom-up 방안 검토 ▼상고법원 기고문 조선일보 버전 ▼상고법원 입법 추진 관련 법무부 대응 전략 등 무려 51건이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검토된 문서였다.
전방위적 로비가 펼쳐졌다. 청와대는 물론, 국회도 로비 대상이었다. 여야 의원이 지난 2014년 12월 공동 발의한 상고법원 설치법(법원조직법 일부 개정법률안) 발의에 앞서 대법원은 법안 발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사실도 문건에서 확인됐다. 몇몇 국회의원들의 실명과 함께 “친분을 앞세워 상고법원 필요성을 강조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실제 이들 중 상당수는 행정처 계획대로 발의안에 이름을 올렸다. 때문에 대법원이 짜놓은 계획에 따라 ‘청부 입법’이 이뤄진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 청와대·국회 로비 위해 어떻게 움직였나?
“당시 행정처에게 상고법원은 지상 최고의 과제였습니다.”(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 관계자)
법원이 공개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 작성 문건
청와대도 설득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사실들은 문건에도 그대로 적시돼 있다.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은 ‘BH(청와대)로부터의 상고법원 입법추진동력 확보방안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최종 정책결정은 VIP(대통령)의 몫, BH의 입법 협조 획득이 절대적”이라고 진단했다. 또 “국회 법사위 야당 내 친민변 성향 의원들의 반대 목소리 극복 위해서는 여당 의원의 전폭 지지가 필요하다”며 “검찰 출신 의원들이 대거 포진한 법사위 여당 분위기도 대체로 비우호적이니, BH 영향력 발휘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설득안도 있었다. ‘대통령에게 상고법원 재판관 임명권을 준다’ 등 청와대 구미에 맞는 계획을 검토하기까지 했다.
앞선 관계자는 “당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상고법원에 부정적이어서, 새누리당 핵심 의원들을 통한 설득 작업도 함께 이뤄졌다”며 “결국 실패했지만, 청와대와의 끈을 만들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 언론도 적극 활용…패널 분석도
조선일보 대응 전략이 담긴 문건.
언론도 상고법원 필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활용했다. 당시 행정처는 ‘조선일보’ 등 핵심 언론사들이 ‘상고법원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기획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에 대법원이 적극 협조한 것은 불보듯 뻔한 흐름이었다.
2015년 5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은 ‘조선일보 홍보 전략 일정 및 컨텐츠 검토’라는 이름의 문건을 통해, 조선일보에 상고법원 관련 기획 기사를 내는 안을 준비했다. 당시 계획은 “5월 13~14일쯤 1차 보도를 한 뒤, 좌담회나 설문조사, 사내칼럼 등을 하자“는 쪽으로 힘이 실렸는데, 이에 대한 장점으로 ”4월 국회 폐회 즈음 논의 필요성 강조 및 서울변회 성명발표 가능 + 법률신문 인터뷰(5월 중순) 연속성 확보“와 같은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 조선일보에 대법관의 업무가 너무 많다는, 상고법원이 필요한 요지의 기사가 실렸다.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하는 패널들도 분석했다. 출연이 잦은 변호사들을 표로 만든 뒤,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법원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등을 정리해 놓았다.
# 자료 공개는 했지만, 검찰에는 ‘외면’
문건들을 먼저 언론에 공개하고 국민들 앞에 반성하는 태도를 강조한 법원이지만 이를 수사하는 검찰과는 여전히 평행선을 걷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와 특수3부 등 수사팀은 법원에 각종 자료를 요청하고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 판사들에 대해서는 통신 영장 등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일제히 퇴짜를 놓고 있다.
특히 검찰과 법원이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는 사건은 문 아무개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 스폰서 의혹 건이다. 검찰은 스폰서 배후로 지목된 건설업자 정 아무개 씨 사건 재판기록 열람등사를 신청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검찰은 문 전 판사가 향응을 받는 비위를 저질렀음에도, 이를 확인한 행정처가 별다른 징계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행정처가 정 씨의 1심 사건은 물론, 항소심에서도 개입해 재판 결과를 챙겼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행정처 윤리감사관실과 문 전 판사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재판부가 밝힌 기각 사유는 “법조 비리와 관계 없는 별건 수사”라는 것. 이번 기각이 처음이 아닌 탓에 검찰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앞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신봉수 부장검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상대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임 전 차장을 제외한 압수수색 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이어 지난달 27일 법원행정처 등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이마저도 기각했다.
검찰은 이례적인 영장 기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언제부터 법원이 별건 수사라고 밝히며 영장을 기각했냐”고 하소연했는데, 실제 수사팀은 기자 브리핑에서 “지금까지 제공되고 있는 자료들이 압수수색도 못할 정도의 소명자료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초기 단계의 압수수색 영장인데 다른 사건의 영장 발부 비중과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고 대놓고 반발했다. 그는 특히 “박영수 특검 수사 당시에는 청와대 압수수색 영장도 발부됐다”며 “불법은 기밀이 아니다”라며 법원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블랙리스트 의혹 등을 검찰 손에 맡긴 김명수 대법원장. 법원 내부에서는 김명수 원장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법원 내에서는 “법원 내 잘못된 의사결정 구조는 털더라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든 최소화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 고위 법관은 “당시 행정처가 그동안의 법원과는 다른, 상식 밖 행동을 한 것은 맞지만 불법으로 죄가 될 행동을 한 것은 아직 없지 않냐”며 “잘못은 고쳐야 하지만 성과 내기에 급급한 검찰에 우리 법원을 수사해 달라고 맡기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검찰과 법원의 힘겨루기에 대해 법조계는 “한 쪽은 억지로 성과를 내려고 하고, 한 쪽은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는 이상한 그림”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과 법원의 대립은 법원이 영장만으로 어떻게 수사 가이드라인을 줄 수 있는지, 즉 법원이 가지고 있는 영장 발부의 위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성과를 내기 위해 별건수사를 자주 활용하는 검찰은 물론, 이에 대해 별다른 인식 없이 관행적으로 영장을 내준 법원도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