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후 걸리기 쉬운 질병은 그 전까지의 직업이 크게 좌우한다.’ 이는 의사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상식처럼 여겨진다. 사진은 노인병원 내부. 일요신문DB
‘정년퇴직 후 걸리기 쉬운 질병은 그 전까지의 직업이 크게 좌우한다.’ 이는 의사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상식처럼 여겨진다. 예를 들어 치매에 잘 걸리는 직업은 교사와 공무원이다. 일본의 쇼난 장수원병원 원장인 프레디 마쓰가와 박사는 “38년간 노인병원을 경영해왔는데, 치매환자들을 상담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전직 교사와 공무원”이라고 말했다. 특히 공무원은 지방공무원이 치매에 걸리기 쉬웠다.
그렇다면 교사, 지방공무원 출신은 왜 치매에 잘 걸리는 걸까. 프레디 박사는 “이들 직업의 공통점이 업무가 반복적이라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가령 교사는 같은 내용의 수업을 해마다 똑같이 강의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나 고전, 지리 등 새로운 발견이 적은 과목을 담당한다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익히 알려진 대로 치매는 ‘뇌의 노화’가 주요 원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치매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지만, 노화에도 개인차가 있듯이 치매 역시 증상이 빨리 진행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그 격차를 낳는 것이 바로 ‘뇌에 대한 자극’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뇌를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면 치매도 예방이 가능하다”고 조언한다.
가나마치 뇌신경내과 우치노 가쓰유키 원장은 “치매 발병의 또 다른 원인이 스트레스”라고 경고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사람의 경우 치매가 발병하는 시기가 훨씬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교사는 직무 스트레스가 큰 편이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장기간 지속되다가 정년을 맞으면 기력이 다 소진돼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때 치매가 발병하기 쉽다”고 말했다.
다만 스트레스가 너무 적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일례로 지방공무원은 구조조정될 우려가 적고, 영업사원처럼 할당된 목표량을 채워야 하는 스트레스도 없다. 성과를 내지 않아도 연공서열에 따라 급여가 자동적으로 오른다. 더욱이 정년이 되면 ‘유유자적 연금 생활’까지 보장돼 있다. 모든 지방공무원이 꼭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뇌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교사, 공무원 이외에도 치매에 걸리기 쉬운 직업군은 여럿이다. 이와 관련, 2016년 캐나다 콘코디아대학교 연구팀은 ‘어떤 직업이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리기 쉬운가’에 대한 연구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연구팀이 3년간 351명을 대상으로 추적조사를 한 결과 “계산원, 기계공처럼 뇌에 자극이 적은 단순노동자들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종에 따라서는 회사원도 위험하다. 내과전문의 아키쓰 도시오 씨는 대표적인 예로 경리사원을 들었다. 경리직은 창의적인 업무가 아니라 숫자가 맞는지가 중요하다. 대체로 성실하며 부지런한 타입이 많다. 영업직과 다르게 인맥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년퇴직 후 자택에서 칩거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키쓰 씨는 “이 경우 자연히 외부 자극이 줄어 뇌의 노화가 촉진되고 결국 치매에 걸리기 쉽다”고 설명했다.
퇴직 후 치매를 예방하는 방법에는 구체적으로 뭐가 있을까. 알츠하이머 전문가 다카시 아키히코 교수는 “뇌를 자극하는 행동과 사회적 관계 등이 인지능력 감퇴를 막아준다”고 전했다. 교수에 따르면, 몸을 잘 움직이지 않을 경우 혈액순환이 나빠지고 결국 뇌혈류도 나빠져 치매 발병을 촉진할 수 있다. 흔히 앉아서 머리를 많이 쓰는 작업을 하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다카시 교수는 “어쨌든 몸을 움직여라. 취미활동이나 모임에 참가해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직 후 찾아오는 ‘무서운 질병’은 치매 말고도 더 있다. 사회활동 감소로 인한 노년기 우울증이 바로 그것이다. 노년기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건 현역시절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사람들. 정신과의사 미야나가 가즈오 씨는 이렇게 지적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정신과를 찾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특히나 기업의 중간관리직이 많다. 위에서는 상사가 내리 누르고, 밑에서는 부하들이 험담하기 일쑤. 스트레스로 뇌세포가 파괴되어 정년 후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증권사 주식트레이더도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항상 긴장감을 갖고 사는 탓에 우울증뿐 아니라 평균수명도 짧은 편이다.”
비교적 새로운 직업인 IT 관련직도 노년 우울증 발병이 우려되는 직업이다. 미야나가 씨는 “IT 관련직은 기술 진보가 빨라 40세가 지나면 현장에서 ‘퇴물’ 취급을 받기도 한다”면서 “이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신체 부진이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스템엔지니어도 마찬가지다. 할당량에 쫓겨 언제나 수면시간이 짧은 직업이므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위험이 높다.
한편 일본의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에서는 직업별로 암 사망률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 결과, 간호시설 등 야근 및 교대근무가 많은 서비스직이 암 사망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불규칙적인 교대근무가 신체리듬을 망쳐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돌연사의 주범으로 꼽히는 심근경색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뇌신경외과 전문의 우사미 시노 씨는 “정신적인 피로가 큰 직업일수록 심근경색 위험이 높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외의 직업을 꼽았다. “장시간 집중을 요하는 직업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가령 조종사는 평균수명이 짧다고 알려졌는데, 퇴직 후 60대에 심근경색으로 숨지는 사례가 많다.”
대체로 조종사들은 착륙 시 극도로 긴장이 고조되면서 혈압이 오르는데, 이것이 혈류장애나 심근경색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뇌수술을 진행하는 외과의사도 요절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뇌수술은 밤새도록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우사미 씨는 뇌경색(심인성)에 잘 걸리는 직업도 언급했다. 시간과 할당량, 마감에 쫒기는 직업은 요주의. 여기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좋아한다면 리스크는 더욱 높아진다. 우사미 씨는 “택배 운전사, 방송관련 제작회사, 편집 프로덕션에 근무하는 사람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전했다.
세상의 어떤 직업도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 젊을 땐 별반 차이가 나지 않지만, 건강에 대한 ‘청구서’는 퇴직 후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나이 들어 갖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려면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건강관리를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