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이 공개되며 파장이 커지고 있다. 법원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설득 전략을 펼쳤고, 여기에 언급된 의원들은 ‘재판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금 국회는 좌불안석이다. 일요신문DB
법원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對)국회 전략’이라는 문건을 작성하며 국회를 전방위적으로 관리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법원은 의원 개인의 성향을 분석해 다각도로 접근 전략을 세웠다. 의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논리적 근거뿐 아니라 정서적 호소와 설득, 현실적‧사실적 효과, 친분관계 및 의원 이해관계 적극 이용’ 등의 방법을 제시하며 전방위 관리 모드로 돌입했다.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 마지막 관문인 법사위원회에 대한 분석도 구체적이었다. 법사위 내 의원들을 찬성과 반대, 유보로 나누며 이에 따라 대책을 모색했다. 또한,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법사위 소속 의원들에 대해서는 ‘접촉 루트’를 상세하게 그려놨다.
김진태 당시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의원의 접촉루트는 당내에서 홍일표‧유승민‧김무성 의원, 중진에서는 이병석‧정갑윤 의원, 친분관계와 사적관계의 인물까지 거론돼 있다. 전해철 당시 새정치연합(민주당 전신) 의원의 접촉루트에도 문재인‧박범계‧전병헌 의원이 언급됐다.
당시 상고법원에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해온 서기호 전 정의당 의원에 대해선 ‘본인의 재임용 탈락 다투는 행정사건 매개로 탄압‧투사 이미지 표출-신속한 사건 종결로 국면 전환, 설득의 주도권 확보’라고 설득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서 ‘본인의 행정사건’이란 서 전 의원이 법원행정처장을 상대로 낸 재판을 뜻한다. 판사였던 서 전 의원이 재임용에서 탈락하며 ‘연임하지 않기로 하는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냈는데, 문건에서는 “변론 종결 등을 통해 심리적 압박을 주는 방안”을 언급하고 있다. 의원 개인의 소송을 볼모로 잡고 상고법원 찬성을 유도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다.
또한, 법원행정처는 ‘공청회 의견 표명에 기초한 법사위원들의 기본 입장 분석’을 통해 의원들을 상고법원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분류했다. 서 전 의원은 여기서 ‘반대’로, 이춘석‧박지원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찬성’으로 나눠졌다.
법원행정처는 이 문건에서 이춘석 의원에 대해 ‘항소심은 사건을 빨리 처리하지 말고 당분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전략을 세웠다. 당시 이 의원은 법사위원인 동시에 당 전략홍보본부장을 맡고 있어 주요 공략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항소심이란 이 의원의 항소심이 아니라 이 의원 지역구의 박경철 전 익산시장의 재판을 말한다. 법원은 이 의원뿐만이 아닌 이 의원의 측근까지 타깃으로 잡은 셈이다.
동시에 법원행정처는 ‘공청회 의견 표명에 기초한 법사위원들의 기본 입장 분석’을 통해 이 의원을 상고법원에 찬성하는 쪽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지난 7월 입장문을 내고 “법원의 주장에 동의한 사실이 전혀 없다”며 “법원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고 하급심의 실질화와 대법관의 다양성이 이뤄진다는 전제조건 하에서만 검토해볼 수 있다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박 전 시장은 “원래 재판을 하면 4월에 끝나야 하는데 한 달 늦어진 5월 26일에 항소심이 끝났다. 양승태 사법부가 재판거래를 시도하면서 기일이 늦어진 것이 명백하고 그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하다”며 “재판거래 당사자로 나의 선거법 위반 재판건이 지역구 국회의원과 논의됐다는 자체가 충격적이며 참담한 일”이라고 말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한 국회의원 재판의 무죄 판결과 관련해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바 있다. 이 관계자는 A 의원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시점에서 “A 의원은 무죄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 편이다. 상고법원 입법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A 의원은 세간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죄를 선고 받았다. A 의원의 판결과 상고법원 입법 거래를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법원은 박지원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이 의원처럼 ‘상고법원 찬성’으로 분류했는데, 이 때 박 의원은 ‘저축은행 비리’ 혐의로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유죄를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때문에 이를 두고 일각에선 ‘박 의원이 상고법원 찬성을 대가로 무죄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의원은 “(저의 재판 판결과는 무관하게) 저는 이전부터 상고법원을 찬성했다”며 무관함을 주장했다. 박 의원은 “저의 재판은 오히려 억울한 측면이 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에도 나왔지만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법부에 압력을 가해서 박병대 전 행정처장을 향해 저의 재판 판결에 유죄가 나오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박 전 행정처장은 이를 거부했다”며 “저는 오히려 이 건을 갖고 법사위 회의에서 ‘내 재판으로 거래를 하느냐’라며 법제처장을 질타했다. 이번 일로 사법부에 배신감을 느낄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같은 국회 안에서도 일부 의원은 재판거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현직 의원은 “만약 실제로 법원과 상고법원을 놓고 재판 거래를 했다면 이는 천벌을 받을 일이다. 당장 정계에서 은퇴하고 처벌받아야 한다”며 “이 부분은 철저히 조사해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그냥 넘어가면 국민들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믿을 수 있겠느냐. 의혹을 갖지 않도록 진상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국회 관계자는 현 국회 분위기에 대해 “의원들 모두 거기에 대해선 말을 잘 안한다. 쉬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넘어가자는 분위기”라며 “그 당시의 여당뿐 아니라 법안을 발의할 때 이름을 올린 의원들 중에는 그때의, 그리고 지금의 여야 지도부들도 있다. 그러다보니 다들 서로 넘어가고 덮어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것”이라고 전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헌정사상 치욕적인 사건이다. 정의의 보루가 돼야 할 대법원이 그들의 밥그릇을 위해 국회를 감시 로비하고 거짓말했다. 범죄조직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대법원에 집중된 권력을 개혁해야 하는데, 이는 외부인 국회에서 해야 한다. 국회가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국민의 대표이니 이들이 해야만 한다. 국민의 신뢰를 이끌어 내서 대법원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일각에선 다른 시각도 제기됐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삼권분립이라는 말은 입법‧행정‧사법부가 100%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독립성이란 것이 타 기관과의 업무협조가 전혀 없어야 하는 것인가”라며 “어디까지 업무 협조인지를 구분하고 기관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협력하느냐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계완 평론가는 “상고법원은 입법과정을 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입법권을 가진 국회 또는 대통령이 두 축에서 추진해 줘야 통과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필수불가결이다. 설득하는 과정을 로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입법부인 국회가 행정부인 청와대와 협력을 시도하면 로비인가? 따라서 기준을 명확하게 하고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 삼권분립의 독립성을 보장하며 중요한 정책의 입법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디까지가 로비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활동인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