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437번지. 제봉산 아래 좁은 골목길이 모세혈관처럼 뻗은 곳. ‘발산마을’은 방직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1960~70년, 여직공의 거주지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방직 산업 쇠락과 함께 공장이 문을 닫으며 마을 규모가 축소됐고 1990년대 도심 공동화 현상이 찾아오며 광주의 대표적인 슬럼가가 됐다. 청년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엔 흉물스러운 빈집이 넘쳐났다. 아무리 집값이 저렴해도 고지대,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도 힘든 골목, 심지어 도시가스도 보급되지 않은 달동네에 제 발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2018년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블로그 등엔 발산마을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후기가 넘쳐난다. 울퉁불퉁했던 길은 평평하게 정돈됐고 소위 ‘핫 스팟’에서나 있을 법한 분위기 있는 가게들도 보인다. 도대체 몇 년 사이 발산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폐가를 리모델링 해 조성한 청춘빌리지. 발산마을의 커뮤니티 센터다. 박혜리 기자
발산마을이 본격적인 변화를 맞은 건 지난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마을미술프로젝트를 시작으로 2015년 국토교통부-광주 서구청의 새뜰마을사업, 현대자동차 그룹-공공미술프리즘의 청춘발산마을사업 등 도시재생 사업이 연이어 선정됐다.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민관협력 도시 재생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발산마을의 도시 재생사업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까닭은 튼튼한 기초공사가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 새뜰마을사업을 통해 도시 가스관 보급, 하수도 정비 등 기본적인 인프라설비 구축이 완료됐고 CCTV와 골목길 안전 손잡이 설치, 경사로 개선 등이 진행됐다. 마을 곳곳엔 잠시 들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원과 그늘막도 마련됐다. 발산마을이 주민들의 일상은 고려하지 않은 채 알록달록 벽화만 칠한 일부 도시재생사업 마을과는 다른 까닭이다.
이재길 새뜰마을사업 총괄 코디네이터는 “발산마을의 재생사업은 청년-주민-정부의 협치 시스템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활성화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자생을 목표로 한다”며 “무엇보다 사업 전부터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을 자발적으로 청소하시는 등 변화를 위해 힘써주실 준비가 돼 있으셨다. 앞으로도 바닥 작업, 공동 주차장, 역사 박물관 등 남아있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도시재생사업으로 발산마을에도 도시가스를 사용할 수 있는 가구가 크게 늘었다. 박혜리 기자
일단 삶의 터전이 정비되니 대부분의 주민은 관광객들의 방문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오히려 관광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공용 화장실이 생기면 좋을 것 같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공공미술프리즘 관계자는 “가끔 어르신들이 쓰레기가 조금 늘었다고는 하시는 정도다. 지금까지 크게 불만을 말씀하시는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마을주민 김 아무개 씨는 “(도시가스가 보급되지 않아) 오랫동안 가스통을 썼다. 길도 좁고 지대도 높아 고생이 많았는데 지난해부터 도시가스가 보급되어 참 편하다. 집 앞에 가로등도 생겼다”며 “주말에 학생들이 많이 오는 데 불편한 건 없다. 앞집은 무너질 것 같은 폐가였는데 관광객이 많아지니 주인이 카페를 만들고 싶다며 집을 새로 고쳤다”고 말했다. 김 씨는 광주 서구청에서 매입한 폐가를 허물고 만든 공동텃밭에 옥수수, 상추 등의 작물을 직접 키우고 있다.
튼튼하게 진행된 기초공사를 기반으로 현대차 그룹과 공공미술프리즘은 컬러아트프로젝트, 청년 입주팀 모집 사업, 마을 문화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발산마을의 상징이 된 ‘청춘빌리지’도 마을 내 폐가를 개축하여 조성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현재 13팀의 청년들은 현대차그룹의 지원금을 받아 마을 곳곳에서 식당, 카페, 소품 가게, 게스트하우스, 예술공간 등을 운영하고 있다.
공공미술프리즘 관계자는 “(컬러아트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중에 집 주인 분들이 개보수 공사를 해도 문제가 없도록 벽화를 그리는 대신 도색작업만 했다”면서 “사업 시행 전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니 청년유입, 문화프로그램 조성을 가장 원하셨다. 다른 곳과 달리 특히 어르신들이 적극적인 참여를 원하신다”고 전했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위험하고 울퉁불퉁했던 골목길이 정돈됐다. 박혜리 기자
실제로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방인 ‘샘몰 경로당’에서도 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가마솥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집 밥 체험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어르신들은 자발적으로 마을을 청소하고 뜨개질 소품·폐품 등을 통해 거둔 이익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한다. 노인회장 이영희 할머니(85)는 “예전에는 커피 한 잔 마실 곳이 없었는데 카페도 여러 개 생겼다.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니 좋다”며 “무조건 아파트를 올리는 재개발을 했다면 우리같은 사람들은 전부 떠나야했을 거다. 다만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오려면 일단 주변에 중·고등학교랑 은행·관공서가 들어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발산마을의 변화가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방문 당시 청년 입주 가게 중 문을 열지 않은 곳도 더러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아직 상권 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또 발산마을만의 확실한 상징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대차 그룹과 공공미술프리즘이 운영해 온 청춘발산마을 사업은 내년 1월에 마무리된다.
청년입주 팀으로 발산마을에 자리를 잡은 A 씨는 “여러 기관에서 도움을 주시고 홍보도 해주신다. 하지만 관광은 먹고 마실 거리, 볼거리, 숙소가 삼박자를 이뤄야 하는데 아직은 입주팀 자체가 너무 적다 보니 딱 2시간 코스 정도밖에 안 된다”고 토로했다. 이어 A씨는 “지금은 딱 적자를 내지 않을 정도로 벌고 있다. 문을 닫은 가게 중에는 수입이 안 돼 당장은 다른 일을 하고 계시는 경우가 많다”며 “이웃끼리 모두 알고 지내고 어르신들이 직접 농사지으신 야채도 주시는 등 이 마을 자체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부분이 크다. 하지만 장사하는 처지에서 느끼는 고충은 분명 있다“고 말했다.
광주=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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