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광복단은 우리 독립군 무장세력의 화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제 자금을 강탈했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1919년 반도는 뜨거웠다. 그 해 3월 일제에 항거한 만세 항쟁이 곳곳에서 열렸다. 그 열기는 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향했다. 3월 13일 만주 용정에 3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운집했다. 김약연, 남인상을 비롯한 지역 민족지도자 17인은 ‘독립선언’을 주창했다.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친일 군벌 맹부덕의 부대는 이들에 사격을 가했다. 현장에서 17명이 즉사했다. 혐의자 300여 명이 체포됐다. 이른바 3·13 사건이다. 이후에도 만주 곳곳에선 간헐적인 항쟁이 지속됐고, 탄압도 이어졌다.
이를 목격한 젊은이들의 혈기는 들끓었다. 만세항쟁으론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의식이 조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오갔다. 결국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젊은이들 사이에선 그러한 소신이 맘속에 심어졌다.
이에 따라 만주와 연해주 지역 곳곳에 무장투쟁을 위한 훈련소와 양성소들이 세워졌고, 무장 세력들이 속속 등장했다.
간도 명동촌의 민족학교 명동중학 출신 열혈청년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임국정, 유준희, 박웅세, 한상호, 최봉설, 김준 등은 이러한 소신 속에서 ‘철혈광복단’을 결성했다. 다만 뒤에서 더 얘기하겠지만, 철혈광복단의 탄생 시기와 그 배경에 대해선 아직 모호하다.
곳곳에 무장 세력이 들어섰지만, 그 화력은 형편없었다. 화력 강화가 필요했다. 그것을 위해선 신식 무기가 요구됐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선 결국 ‘돈’이 문제였다.
‘일화 15만 원’ 탈취사건 거사에 참여했던 단원들 모습. 윤준희, 임국정, 박웅세, 김준, 한상호, 최봉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철혈광복단 6인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독립군의 화력강화가 필요하다. 무기를 구입하자! 그러기 위해선 자금 확보가 최우선이다. 그럼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까.’
그들은 너무나 대담무쌍한 방법을 계획한다. 까짓것 일제의 돈을 강탈하자고. 본지가 입수한 이들의 판결문에 의하면, 그들의 이 대담한 계획에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한 행원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판결문에는 철혈광복단원들과 함께 법정에 섰던 조선은행 소속 행원 전홍섭의 행보가 언급된다.
전홍섭은 1919년 9~12월 사이 수차례에 걸쳐 단원들과 접촉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행 ‘회령지점 발-용정지점 착’ 일화 15만 원(현 추정가치 한화 250억 원) 운송 계획이 단원들에게 전달됐다. 1920년 1월 4일 돈을 실은 수레가 용정을 지난다는 것. 전홍섭의 첩보는 정확했다.
단원 6명은 각각 윤준희, 박웅세, 김준 그리고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 두 개 조로 나뉘어 1월 4일 새벽 각각 용정의 버들방천과 근거리의 선바위에 매복했다. 돈을 실은 수레는 그들이 매복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수레는 일본 순사 3인, 한인 순사 1인, 조선은행 회령지점 한인서기 김용억, 회령의 한인상인 진길풍 등 6인이 수송 중이었다. 단원들의 탈취 과정에서 선임경관 나카모토 순사가 관통상으로 사망했다. 함께 관통상을 입은 진길풍은 다음날 죽었다.
1921년 전홍섭, 한상호, 임국정, 윤준희에 대한 당시 최종 판결문. 출처=국가기록원.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다만 판결문에선 이들이 “결코 인명을 살해하는 일로서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안 된다…탈취한 돈은 반드시 공적으로 사용하고, 호위자를 살해하지 않도록 포승을 휴대할 것을 결의했다”고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애초부터 호송자를 살해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는 의도치 않은 살해로 인해 현실이 됐다. 일단 거사는 성공이었다. 박웅세와 김준을 제외한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설은 각각 돈을 3등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거사 지역에서 350km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일이 터진 후 일본헌병대는 부랴부랴 그들의 근거지였던 명동촌을 수색하고,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주민 일부가 학살당한다.
그들이 조선은행의 거액을 탈취한 궁극적 목적은 앞서 말했듯 독립군 무장을 위한 무기구매였다. 리더 윤준희가 노렸던 무기는 체코의 총 3만 자루였다. 당시 러시아는 왕정옹호파인 민셰비키와 혁명군인 볼셰비키가 경합을 벌이던 중이었다. 점차 무게의 추는 볼셰비키 쪽으로 기울어 갔고, 민셰비키를 지원하기 위해 원정을 온 체코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총기를 외부에 적당한 값을 받고 매각하려던 참이었다. 여기에 철혈광복단이 선을 댔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체코의 신식 소총 3만 자루가 실제 이들의 뜻대로 독립군 손에 들어왔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독립군의 화력 배가는 당연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발각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재하던 일본 영사관 쪽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1920년 1월 31일 ‘첩보’를 입수한 일본헌병대는 그들이 머물던 신한촌을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탈출에 성공한 최봉설을 제외하고 거사에 가담했던 단원들 모두가 체포됐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재판기록은 두 갈래다. 우선 박웅세는 1921년 2월 강도살인 정치에 관한 범죄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그의 실제 처형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두 번째 재판기록이 바로 본지가 완역본으로 입수한 전홍섭(앞서의 협조자), 한상호, 임국정, 윤준희에 대한 것이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홍섭을 제외하고, 1921년 4월 역시 경성복심법원에서의 상고가 기각됐으며 모두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 세 명의 서대문형무소 교수형 기록은 현재도 남아있다. 1921년 8월 21일의 일이다.
철혈광복단은 훗날 우리 몇몇 영화 시나리오에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진은 영화 ‘놈놈놈’의 한 장면.
하지만 현재까지 체포된 5명 중 한 명인 김준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의 재판기록 및 처형 여부에 대한 그 어떤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그가 체포되고 실제 재판을 받았는지, 그리고 형을 언도받았는지 현재로서는 베일에 가려 있다.
유일하게 탈출에 성공한 최봉설은 훗날 러시아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대한의용군사관학교를 거쳐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한데 모아 적기단이란 조직을 세우고 단장을 지내기도 한다.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 최봉설은 안타깝게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당해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판결문에서 재판장은 상고 기각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각 피고의 상고 취지는 자기의 행위가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기초해 의사가 발동하여 행한 범죄임으로 제1, 2심에서 받은 유죄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고, 따라서 위법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나 원심은 증거에 의해 죄로 삼을 만한 사실을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피고의 논지는 자기의 의견으로 죄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함에 불가함으로 상고를 기각함.”
즉, 단원들은 재판에 임하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위를 ‘민족의 정의와 인도에 기초한 행동’으로 주장하며 맞섰던 것이다. 그들의 기개가 법정에서도 대단했던 셈이다.
한편으론 그들이 심문 과정에서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가 판결문 곳곳에 드러나기도 한다. 판결문에선 이렇게 언급된다.
“(피고는)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을 때,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경을 헤매었기 때문에 정신을 잃고 사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을 진술하기도 했다. 참으로 그 당시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진술했다…심문하는 헌병은 피고의 것(증거물인 수첩)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피고는 ‘수첩이 없다’고 대답하니 무수히 난타를 당했다.”
하지만 재판관들은 이러한 헌병대의 고문 행위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기록을 살펴보니 헌병대에서 피고가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한 사적이 없다. 논지 중 고문을 받은 듯이 주장하는 부분은 신용할 수 없다.”
재판관들은 그들의 주장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철혈광복단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최봉설의 중년 당시 모습
철혈광복단의 거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 있다. 애초 그 성격이 비밀결사체였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사건 무대가 만주 및 연해주였다는 점, 그동안의 무관심도 한몫을 하고 있다.
우선 그 조직의 성격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나온다. 학계에서는 ‘철혈광복단’을 간도 대한국민회(1919년 3·1운동 직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 민정조직은 물론 군사조직도 갖추고 있었다)의 외곽단체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연해주 신한촌에 근거하여 기존의 광복단과 철혈단이란 결사체가 통합됐다는 시각도 있다.
그 규모와 숫자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최봉설은 훗날 자신의 수기를 통해 “300여 명의 여성단원을 포함해 그 단원 수가 1353명에 달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바로 그들의 거사를 일본 영사관에게 귀띔한 ‘밀고자’에 대한 부분이다. 한때 홍범도, 이범석, 안중근 등과 함께 항일투쟁 했던 엄인섭이 첫 손에 꼽힌다. 엄인섭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거두 최재형의 외조카로 유명하다. 한때 지역에서 의병 모집과 총기 및 자금 수집을 꾀했던 투사였지만, 1910년 이후 변절하고 일제의 정탐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밀고가 거사를 막는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또 다른 협조자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다름 아닌 단원들의 스승이자 거사의 기획에 관여했던 김하석이다. 그는 판결문에서도 거사를 도운 인물로 언급되지만, 정작 유일한 생존자인 최봉설은 훗날 수기에서 김하석을 ‘정탐’으로 단정한다. 최봉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은 바로 앞에 있던 셈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최봉설의 주장에 대해 ‘훗날 사상적 노선을 달리했기에 벌어진 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처럼 철혈광복단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과 그 성격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순국선열유족회는 내달 중 ‘철혈광복단’에 대한 학술회의를 계획 중이다. 만주와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사를 오랜 기간 연구해 온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가 여러 자료를 통해 재조명할 예정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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