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은 일제강점기 친일파 암살에 나선 독립투사들의 얘기다. 영화 속 백방으로 활약하는 남성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여성이 있다. 바로 독립군 소속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적을 향해 장총을 겨누는 결연한 눈빛은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됐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앞에 설치된 남자현 여사 관련 조형물. 사진=박혜리 기자
영화의 흥행에도 안옥윤이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바로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 여사(1872~1933년)다. 수식어대로 그는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와 잘린 손가락 마디를 국제연맹조사단에 보낸 인물로 대중에 알려져있다.
하지만 남 여사에 대해 진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만주대사 부토 노부요시 저격을 시도하는 등의 무력투쟁을 벌인 여걸이라는 점이다.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 교육, 의료, 후방 지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 지사의 사례는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록 자체가 적지만 특히 무장투쟁을 벌인 여성에 대한 기록은 턱없이 부족하다.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경북지역 여성 중에서는 남자현, 김노숙, 이근숙 등이 무장투쟁을 했지만 기록 자체가 워낙 적다”면서 “중국 쪽 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사회주의를 수용한 항일 유격대, 동북 항일연군에서도 활동했던 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남성들의 무장투쟁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무장 투쟁 역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일본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남자현 지사는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은 주로 남편, 아들 등 가족을 따라 만주로 떠났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남자현 여사처럼 주체적으로 만주행을 선택한 여성들도 나타났다.
경북 영양 출신의 남자현 여사는 1919년 만 46세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지역에서 교육,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독립단체 통합 등의 활동을 하던 남 여사는 1925년 동료들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다. 하지만 거사 직전 동지 중 한 명이 일본군에 미행당하며 거사는 수포가 돌아갔고 남 여사는 가까스로 만주로 돌아간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남 지사는 1933년 주만주국 일본 장교 부토 노부요시를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동 중 하얼빈에서 일본군에 체포되고 만다. 그의 나이 60세가 넘은 시점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한 여성 중에는 김노숙 여사(1906~1936)도 있다. 1912년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김노숙 여사는 여성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부녀대’를 조직했다. 또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여사(1860~1935)는 ‘안사람의병가’, ‘방어가’ 등 선동가를 짓고, 화약과 탄환을 제조했으며 남장을 하고 의병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세대 한국여성독립운동 연구가 박용옥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1930년대 조선족 중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여성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한동안 이념 논리 때문에 진행되지 못했다”며 “군대를 위해 밥을 짓는 작식대와, 제봉대에 속한 여성도 있었지만 허성숙과 같이 직접 총을 든 여성도 많다”고 말했다.
안경신 지사는 누구보다도 무력투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여성이었다. 사진=박혜리 기자
여성 독립운동가 중 윤봉길 의사와 같은 폭탄 거사를 한 인물도 있다. 바로 평양 대동 출신의 안경신 의사(1888~?)다. 안 의사는 누구보다도 무력투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여성이었다.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 총영에서 활동한 안 의사는 1920년 8월 3일 미국의원사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평남도청 등 일제 통치 건물에 폭탄을 투척했다. 놀랍게도 의거 당시 안 의사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의거 직후 안 의사는 함경남도로 피신했지만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간 옥고를 치렀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무장투쟁은 사례 자체가 워낙 적지만,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은 눈여겨볼 만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에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연구 용역을 맡겼다.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이번 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을 진행한 202명의 여성을 추가 발굴하고 이를 8월 8일 진행된 ‘제1회 한국여성독립운동가 발굴 학술심포지엄’을 통해 발표했다. 지난 15년 동안 여성독립유공자가 불과 147명 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주목할 만한 성과다.
8월 8일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제1회 한국여성독립운동가 발굴 학술 심포지움이 개최됐다. 사진=박혜리 기자
물론 이번에 발굴된 여성 모두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는 건 아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발굴된 202명의 여성에 대해 국가보훈처에서 심사를 거쳐 독립유공자를 선정하게 될 것”이라며 “일단 이번 광복절에 이들 중 26명을 추가 서훈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사람은 1만 4830명이며 이중 여성은 2%에 불과한 296명이다. 독립운동의 세계가 주로 남성의 영역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여성이 독립운동사에서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것이다.
기조발제를 맡은 박용옥 성신여대 교수는 “3·1운동 참여자가 200만~300만 명이라고 추측되는데 그 중 여성 참여자가 얼마인지 집계되어 있지 않지만, 국내외의 모든 참여자 중에는 절반이 여성이라고 기술된 부분들이 많았다”며 “지도적 위치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진행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들이 체포·구금으로 판결문을 넘기지 못한 분들은 독립유공 대상자에 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이 추진될 수 있도록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8일에 진행된 국가보훈위원회에서는 남성 중심의 기준으로 인해 그동안 제대로 된 포상을 받지 못했던 여성·학생·의병 등을 포상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정은 이사장은 포럼을 통해 “여성에 대한 자료가 적다는 점을 고려해 앞으로 일기, 회고록, 자서전 등 직·간접적 자료도 포상 과정에서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언더커버] 우리가 몰랐던 독립투쟁사3―광복군 그리고 국군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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