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는 뉴스를 들었다. 저건 봐야지, 하는데 문득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한용운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하는. 지금 상황에 맞추자면 길고 무덥고 무서운 폭염 끝에 올려다보게 되는 하늘이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듯 내가 기억하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제는 한용운 시인의 그 시, “알 수 없어요”의 바로 그 문장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고 지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내게도 푸른 하늘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푸른 하늘이야말로 평생 ‘나’의 삶을 지키는 힘이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
프란체스카, 비록 개성 없는 미국 땅에서 살긴 하지만 요리 좋아하고 아리아를 사랑하는 섬세한 이탈리아 여인이다.
그러나 가정주부인 그녀를 남편도, 아이들도 존중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다. 아리아를 틀어놓고 요리를 하며 밥 먹으라, 부르면, 딸은 주방에 들어오자마자 엄마가 듣고 있는 아리아를 무시하고 채널을 바꾸고, 아내의 섬세한 요리를 즐길 줄 모르는 남편은 케첩을 찾는다. 그녀는 살짝 당황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외롭지도 않은 것 같다. 삶은 그런 것이라 달관했으므로.
그렇게 살던 그녀에게 운명의 바람이 분다. 공허한 마음에 그녀가 그 바람을 찾아, 바람의 향기를 따라 떠난 것이 아니다. 떠난 것은 남편과 아이들이다. 식구들이 나흘 동안 집을 비운 사이 길을 잃은 사진작가 로버트가 길을 물어보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시작된 나흘간의 연애, 그것은 삶은 길고 지리한 장마일 뿐 아니라 장마 끝에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고, 예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사랑은 배려다. 나흘 동안 섬세하게 그녀를 배려했던 로버트는 그녀에게 함께 떠날 것을 제의한다. 그는 간곡히 그녀의 선택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무심하고 배려 없고 때로는 무례하기까지 한 가족 곁에 남았다. 섬세한 로버트는 그녀처럼 괴로웠지만,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누군가가 정색을 하고, 잠시 남편으로부터,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녀의 행동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이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녀의 안타까운 선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너도 그렇게 살고 싶은 거냐고 물으면 분명히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평생을 움직이는 나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울 메이트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의 눈이 훨씬 깊고 반짝인다는 사실도.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