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해석의 차이”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 하나의 의미로만 볼 수는 없다는 반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영 당시 관객과 언론이 지적했던 부분이 VOD 버전에서는 일제히 수정되며 오역이라는 지적이 타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됐다.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홍보 스틸 컷
# 어느 부분이 바뀌었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와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대화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타노스와의 대결 끝에 자신이 갖고 있던 ‘타임 스톤’을 건넨다. 그 스톤이 없으면 타노스의 초강력 무기인 건틀렛을 완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언맨은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물었다.
이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We are in the end game now”라고 말했다. 영화상 이 장면은 “이젠 가망이 없어”라고 번역됐다. 하지만 ‘end game’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이미 미래를 보고 온 닥터 스트레인지가 합리적인 판단 하에 스톤을 건넸다는 뜻이다. 결국 VOD 버전에서는 “이제 최종 단계야”로 수정됐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스톤을 건넸다는 것으로, 영화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대목이다.
또한 영화 쿠키 영상(엔딩 크레디트가 끝난 후 나오는 보너스 영상)에 등장한 닉 퓨리(새뮤얼 L 잭슨 분)가 “mother fxxxxx”이라고 말꼬리를 흐리는 장면의 자막도 변경됐다. 영화 상영 당시에는 ‘mother’를 1차원적으로 해석해 “어머니”라는 자막을 달아 빈축을 샀다. 평소 거친 언사를 일삼는 닉 퓨리의 성향에 비추어봤을 때 이 대사는 ‘mother fxxxxx’라고 욕을 하는 것이란 의견에 무게가 실렸고, VOD 상에는 “아, 이런”으로 탈바꿈됐다.
캡틴아메리카(크리스 에번스 분)의 대사도 달리 해석됐다. 그가 “We don’t trade lives”라고 말한 장면의 자막이 영화관에서는 “친구를 버릴 수 없다”였지만 다소 의미를 바꿔 “모든 생명은 소중해”로 변경됐다. 직역하자면 “우리는 생명을 거래하지 않아”인데, 정의를 추구하는 캡틴아메리카의 평소 행동으로 짐작컨대 단순히 친구를 구하자는 것보다는 생명을 중시하는 의미가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어벤져스3’에 등장하지 않은 호크아이(제레미 레너 분)와 앤트맨(폴 러드 분)의 행방도 보다 명확해졌다. 영화관 버전에서는 이들이 소코비아 협정에 서명하고 은퇴했다고 처리한 반면 수정 자막은 그들이 ‘가택 연금 중’임을 알렸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서도 그들이 타노스와의 싸움에 동참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된 셈이다.
이 외에도 타노스의 캐릭터도 보다 설득력을 얻게 됐다. 그는 전 우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떤 기준 없이 생명체의 절반을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분)가 타노스의 공격을 받은 자신의 고향인 아스가르드의 국민의 절반은 살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와 ‘무작위로 부자든 가난하든 공평하게 죽였다’는 설명이 포함돼 타노스의 캐릭터가 더욱 탄탄히 구축됐다.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홍보 스틸 컷
# ‘번역가 실명제’가 필요하다
‘어벤져스3’의 자막 논란으로 이 영화의 번역가로 참여한 박지훈 씨는 집중포화를 맞았다. 일부 관객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박지훈을 퇴출하라’는 취지의 글을 올리며 성난 민심을 드러냈다. 박 씨가 마블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전담하다시피 번역해 온 것을 문제 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에 따른 영화 수입 및 배급사들의 대응은 어땠을까? 그들은 이번 논란을 계기로 번역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번역가를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실례로 ‘어벤져스3’ 이후 처음으로 관객과 만난 마블표 영화인 ‘앤트맨과 와스프’는 번역가의 실명이나 닉네임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 ‘인크레더블2’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션 임파서블’의 경우 3년 전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개봉 때는 ‘치키런’이라는 번역가를 공개했었기 때문에 이번 조치는 대중의 눈치를 보는 것이란 분석에 무게가 실렸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대중이 번역에 워낙 민감하게 반응하는 때인 터라 수입배급사 입장에서는 괜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번역가를 밝히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해당 작품에 참여한 번역가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대중의 ‘알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번역에 큰돈을 들이지 않으려는 일부 업체들의 계산이 숨어 있다. 영화의 편당 번역료는 200만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 등 다른 영역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또한 시간도 충분히 할애되지 않는다. 결국 번역이 졸속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어벤져스3’와 같은 논란에 휩싸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양국의 정서를 정확히 파악해야 작품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양질의 자막을 붙일 수 있다”며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는데 지금의 영화 번역은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