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일 목사 “아버지, 퇴임 1년 전 후임 정하고 중요 결정 당회에 맡긴 뒤 물러나”
-김 목사 “교회 세습은 부와 권력의 세습... 전혀 공정하지 않다” 날선 비판
[일요신문] “사실 어떤 교회에 부교역자로 가면서도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적이 없어요. 일단 이력서 내고 ‘거기서 일하게 됐다’고 ‘통보’했죠. 혼자 이력서 내고 인터뷰까지 다 마쳤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그쪽 아들이 우리 교회에 지원했다’고 말씀하셔서 아버지께서 아신 때도 있어요(웃음)”
김신일 목사는 가까운 교회 목사이자 가까운 책방 주인이다. 사진=박혜리 기자
등록 신도만 수만 명, 재정규모가 1000억 원대에 달하는 명성교회의 부자세습 논란이 뜨겁다. 예장 통합총회가 지난주 열린 목회세습 결의 무효 소송에서 명성교회의 손을 들어주며 ‘세습금지법’이 완전히 부정당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더욱 심각한 건 교회의 부자세습 문제가 비단 명성교회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와중에 새로운 길을 택한 목사 부자가 있어 눈길이 쏠리고 있다. 바로 김상인 가장제일교회 원로목사와 김신일 가까운교회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신일 목사를 포함해 김상인 원로목사의 세 아들은 현재 모두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각자도생’이다. 대전 중구 대흥동 대전여중 앞 ‘가까운 책방’에서 김신일 목사(49)를 만났다.
김 목사를 만난 ‘가까운 책방’은 그가 운영 중인 그래픽노블(Graphic Novel) 전문서점이다. 그래픽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으로 예술석 성향이 강하게 표현된 작가주의 만화다. 김 목사는 “원래 그래픽노블을 좋아해서 컬렉션을 모으다가 작년 11월 작은 책방을 열게 됐다. 청소년 독서모임, 기독교 잡지 독자 모임 등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 이름 역시 ‘가까운 교회’다. 올해 2월 문을 연 가까운 교회는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로 현재 교인은 20명 정도다. 독특한 점은 별도의 교회 건물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매달 페이스북을 통해 재정보고를 한다.
김 목사는 “주일마다 대전환경운동연합 교육실을 빌리고 있는데 한 달에 12만 원의 대여료를 낸다. 누군가 희생하는 방식을 원치 않아 식사는 김밥으로 결정했다”면서 “많은 교인이 목사가 무엇인가 해주길 바라지만 교회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배방식, 헌금 사용까지 함께 정한다. 전체 헌금액의 10%를 적립하고 20%를 목회 활동비로 받고 있다”고 밝혔다.
김신일 목사에게는 목사, 책방주인 외에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이라는 직함도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최근 대두되고 있는 명성교회의 부자 세습를 비판하며 항의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김 목사는 명성교회 사태에 대해 ‘교인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입을 뗐다. 그는 “어떤 교회보다도 명성교회의 잘못은 크다. 아주 크고 힘 센 (명성)교회가 내린 이번 결정은 다른 교회가 도미노처럼 잘못된 결정을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명성교회가 교회 헌법을 정면으로 어겼음에도 재판국은 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교회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명성교회가 가진 부와 권력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김 목사는 “교단이 분리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를 표하시는 분도 있고 교단 탈퇴를 선언하신 분도 있다”며 “과거에 새노래명성교회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본 결과 대표자 명의가 김하나 목사가 아니라 김삼환 목사였다. 엄연히 따지면 여기부터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교회 규모가 작거나 자녀가 능력이 있으면 상관없지 않으냐는 얘기도 있지만 김 목사는 ‘세습은 악’이라고 단언한다. 김 목사는 “신앙의 본질은 ‘내가 아니어도 된다’다. 능력 있는 사람은 많다. 왜 꼭 아들이어야 하는가”라면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어려서부터 ‘목사님 아들’로써 대우받고 살아온 기득권이 분명 있다. 교회 세습은 부와 권력의 세습이다.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목사들의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유명한 목사 아버지’를 둔 김신일 목사 역시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매년 쏟아지는 목사 수를 주체하지 못해 신학교를 졸업했음에도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기이한 상황마저 연출된다. 목회자 사이에서 유명 목사 아버지를 둔 사람은 ‘성골’이라는 씁쓸한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김 목사의 아버지 김상인 목사는 1981년 대전에서 ‘가장제일교회’를 개척했다. 피아노 교실에서 첫 예배를 시작한 가장제일교회는 현재 700여 명의 교인들이 속한 중·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장남인 김 목사를 포함해 둘째 셋째 동생 역시 각각 경기도 광주의 기도원과 미국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던 김 목사에게는 그야말로 ‘추억의 공간’인 셈이다.
김 목사는 “그럴 능력도 되지 않고 아버지와 그런(세습) 얘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아버지께서 은퇴하기 1년 전부터 교회 내부에서 후임 목사님이 이미 결정됐고 두 분이 일정 기간 동시 사역하셨다”며 “동사하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개척하고 지금까지 안식년을 가져본 적 없으니 은퇴하기 전 1년은 쉬어야겠다. 중요한 결정은 당회에서 후임 목사님과 해달라’며 한발 뒤로 물러나 계셨다”고 말했다.
세대와 생각의 차이가 있는 만큼 두 부자의 사역 스타일도 다르다. 김 목사는 “나는 반소매 티셔츠에 샌들을 신는 등 편한 복장으로 예배를 진행한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아버지 세대와는 차이가 있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는 ‘그러고 예배하고 왔니’라고 물으시더라(웃음)”고 말했다.
김 목사는 세습과 관련해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아버지께서 목사직을 은퇴하시며 대전신학대학교 이사장에서도 내려 오셨다. 나는 당시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는데 이임식에 참석하니 한 분이 내게 ‘목사님 복지관 언제 가세요?’라고 물으시더라. 무슨 말인가 했는데 사실 복지관은 새로 취임하시는 목사님이 관장으로 계시던 곳이었다. ‘교차세습’에 대해 언급한 거다. 정말 기분 나빴던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김 목사 역시 유명 목사의 아들이라는 점이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고 인정했다. 김 목사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버님이 어디서 목회 활동을 하신다고 하면 아는 분들이 많이 생기신다. 나는 음으로 양으로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성골, 진골 얘기가 판치는 시대지만 김 목사는 자신을 ‘반골’이라고 규정한다. 또 진리는 목사가 독점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장로가 되려면 몇 천만 원, 안수집사가 되려면 500만 원 이상은 내야 한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얘기된다.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반기를 드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건 하나님 나라의 복음 가치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대전=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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