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사진=외교부
외신에 따르면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은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투병 중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이 설립한 비영리재단 ‘코피아난 재단’은 18일 트위터를 통해 “8월 18일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이 짧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남은 생애동안 아내와 자녀들이 곁을 지켰다”고 전했다.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의 전임자인 코피아난 전 총장은 ‘최초’라는 말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유엔 직원 최초로 평사원 출신으로 사무총장 자리에 까지 올랐으며 현직 유엔 사무총장 중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코피아난 전 총장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가나에서 1938년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피는 ‘금요일에 태어난 소년’이란 뜻이다. 포드 재단의 후원 아래 미국 미네소타의 매칼레스터 대학을 다니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까지 받은 코피아난 전 총장은 1962년 세계보건기구(WHO) 행정관 및 예산 담당관으로 입성했다.
이후 UN 내에서 기획예산 책임, 감사관 등 다양한 업무를 맡은 코피아난 전 총장은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1997년 UN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동안 UN사무총장 자리가 제3세계 외교관들의 몫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결정인 셈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코피아난 전 총장의 전임자였던 부트로스 갈리 전 총장이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재임해 실패했다는 점도 그의 선임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은 재임시절(1997-2006년) 그동안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UN을 국제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2개에 달했던 사무국 조직을 5개로 통폐합하고 주권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할 경우 국제사회가 인도주의적인 간섭에 나설 수 있다는 ‘인도주의적 개입’ 개념을 확산시킨 점은 그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결국 2001년 12월 코피아난 전 총장은 유엔 개혁과 에이즈 확산 방지 등의 업적을 인정받아 유엔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딘다.
하지만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이 칭송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친미 사무총장’이라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실제로 그는 효과적으로 UN을 운영하기 위해선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는 미국 부시 행정부를 향해 ‘유엔의 인증을 받지 않고 실시하는 어떤 무력제제 조치도 불법’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은 퇴임 후에 더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UN사무총장 자리에서 내려온 후 출신국 가나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으로 꼽혔지만 이를 마다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사회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퇴임 직후 스위스 제네바에 자신의 이름을 딴 비영리재단 ‘코피아난 재단’을 세우고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가 설립한 국제 원로 자문모임 ‘디 엘더스’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코피아난 전 사무총장의 별세 소식에 외교부도 애도를 표했다. 외교부는 18일 성명서를 통해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평생 헌신해 왔다”면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은 유엔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도 깊이 기억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