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의미와 이야기를 전달하곤 한다. 강렬한 사진 한 장이 쉽사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또 오래도록 회자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셔터를 누르는 전속 사진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거 로널드 레이건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로 일했던 피트 수자(63)가 최근 영향력 있는 SNS ‘인플루언서’로 급부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스타그램에서 200만 명이 넘는 팔로어를 두고 있는 수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워싱턴을 떠났으며, 현재 SNS에서 ‘트럼프 저격수’로 활동하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그의 인기 비결은 자신이 찍었던 오바마 정부 시절의 사진을 통해 현 트럼프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데 있다. 요컨대 노골적으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사진을 통해 간접적인 풍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풍자 사진들은 오는 10월 사진집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며, 이로써 수자는 영향력 있는 ‘정치 활동가’ 겸 ‘정치 사진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됐다.
백악관 직원의 아들을 위해 허리를 숙여주는 오바마의 모습으로 피트 수자의 대표적인 사진이다.
“나는 늘 하나의 목공예 장식품이 되려고 노력했다.”
백악관 전속 사진사로 일한다는 것에 대해 수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다시 말해 가장 자연스러운 대통령의 모습을 찍기 위해선 항상 대통령 주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되,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민감한 국가안보 회의나 국가적 비극에 대한 브리핑이 열리고 있을 때나 오바마가 집무실을 방문하는 어린이들을 맞이하는 따뜻한 순간에도 늘 최대한 조용하게 작업에 임했다는 것이다.
수자는 “나는 늘 그곳에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말을 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으로서 참석했던 모든 회의에 동석했고, 거의 모든 상황에 함께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수자는 지난 8년 동안 오바마의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진솔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고, 이렇게 찍은 사진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면서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생생하면서도 자연스런 사진들을 묶어 출간한 첫 번째 사진집인 ‘오바마: 친밀한 초상’은 미국에서 역대 가장 성공한 사진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사진집은 현재 8쇄까지 인쇄된 상태며, 아직까지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피트 수자의 두 번째 사진집 ‘셰이드: 두 대통령 이야기’.
‘그늘’이란 뜻의 ‘셰이드(shade)’는 워싱턴 정가에서는 종종 ‘비난’ ‘비판’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번 사진집은 트럼프 정부를 향한 비판적 성격이 강한 정치적 사진집이 될 전망이다. 실제 지난 5월 수자는 인터뷰에서 “첫 번째 사진집이 커피 테이블용 책이었다면, ‘셰이드’는 모든 테이블에 어울리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한 “이번 사진집은 과거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었는지를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 비춰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즉, 오바마 시절의 사진들을 통해 현 트럼프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인 ‘리틀, 브라운 앤 컴퍼니’ 측은 사진집에는 과거 수자가 촬영한 100장이 넘는 오바마의 사진이 담겨 있으며, 각각의 사진들은 모두 그동안의 트럼프 관련 언론 기사, 트윗, 발언 등과 함께 나란히 비교되어 실려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커튼보다 옛날 커튼이 더 좋다.”
이처럼 수자가 ‘트럼프 저격수’가 된 것은 처음부터 의도됐던 것은 아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됨과 동시에 백악관을 떠났던 그는 딸과 함께 위스콘신주 매디슨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자연 풍경과 동물 사진을 주로 찍으면서 사진작가로서 조용히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럼프의 백악관 집무실 사진을 봤던 수자의 머릿속에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수자는 “트럼프의 집무실은 마치 금으로 도배된 궁전처럼 보였다”고 말하면서 오바마의 집무실과 트럼프의 집무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오바마의 집무실 사진 한 장을 찾아서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업로드했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나는 지금 커튼보다 옛날 커튼이 더 좋다”라는 짤막한 글도 적었다. 이 사진은 곧 누리꾼들에서 화제가 됐다. 9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고, 2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사진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좋자 그때부터 수자는 계속해서 비슷한 식의 포스팅을 이어나갔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나 트럼프의 막말이 논란이 될 때마다 오바마 정부의 사진을 올리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트럼프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자의 풍자 방식이 더욱 센스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단 한 번도 트럼프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오바마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의 풍자에 대해 수자는 “이런 방식은 워싱턴에서 일어나는 재난에 대해 사람들이 잠시라도 웃을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치료법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한 수자는 독일 시사주간 ‘포쿠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기사를 볼 때마다 즉시 그것에 맞는 사진 한 장이 머릿속에 떠오른다”고 말했다.
“수석 참모진들과의 미팅.”
일례로 지난 2017년 2월, 트럼프의 참모진들 대부분이 남성 위주로 꾸려졌다는 기사를 접한 수자는 곧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오바마와 세 명의 여성 참모진들이 모여있는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이 사진은 허리 아래부분만 촬영된 것으로, 오바마를 제외한 사진 속의 여성 참모진들은 모두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사진과 함께 수자는 “수석 참모진들과의 미팅”이라는 짤막한 글을 올렸다. 이 사진 한 장과 글 한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가 봐도 명확했다.
“세상에 로켓맨은 단 한 명뿐이다.”
그런가 하면 2017년 9월,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을 가리켜 ‘로켓맨’이라고 불렀을 때도 수자는 과거 백악관을 방문했던 엘튼 존과 오바마의 사진을 올리면서 우회적으로 트럼프를 비꼬았다. 그리고 사진 옆에는 “세상에 로켓맨은 단 한 명뿐이다. 2015년 오바마 대통령과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적었다.
“진짜 대통령을 기다리는 진짜 개.”
이렇게 시작된 날카로운 풍자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됐던 게시물은 트럼프가 오마로사 매니골트 뉴먼 전 백악관 직원을 가리켜 ‘그 개(the dog)’라고 부른 것을 겨냥한 사진이었다. 뉴먼이 곧 출간될 자신의 폭로성 책 ‘정신나간’에서 “트럼프는 흑인들을 가리켜 ‘깜둥이(nigger)’라고 부르는 등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수시로 했다”고 폭로하자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켈리 장군이 ‘그 개’를 신속히 해고한 건 잘한 일”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개’ 발언이 논란이 되자 다음 날 수자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오바마와 오바마의 애완견인 ‘보’의 사진을 한 장 소개했다. 사진 속에서 ‘보’는 집무실로 막 들어서는 오바마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 사진과 함께 수자는 “진짜 대통령을 기다리는 진짜 개”라는 글을 올렸다. 이 사진은 수자가 보여준 날카로운 비판력이 돋보이는 사진 가운데 한 장으로 꼽히고 있으며, 현재 1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른 상태다.
“친한 친구들.”
그런가 하면 지난 6월, G7 정상회담 때 트럼프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포착되자 수자는 2015년 G7 회담 때 오바마와 메르켈이 뮌헨 산에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진을 올리면서 트럼프를 비꼬았다. 그리고 사진에는 ‘친한 친구들(besties)’이라는 글도 곁들였다.
때로는 강도 높은 비난이 담긴 사진과 글도 올리곤 했다. 가령 2017년 8월, 허리케인 하비로 텍사스주에 물난리가 났을 때 보여줬던 트럼프의 처신에 대한 비난이 그랬다. 당시 트럼프는 텍사스의 수해 현장을 방문하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주민들을 직접 만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을 보고 놀란 듯 “정말 많이 모였네요, 굉장하네요”라며 감탄만 할 뿐이었다.
또한 피해 지역 가운데 하나인 코퍼스 크리스티를 방문했을 때에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40달러(약 4만 5000원)짜리 야구모자를 쓰고 수해지역을 돌아보는 노골적인 행동을 해서 비난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적 재난을 개인 사업의 홍보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옆에 있는 이웃을 도울 때.”
이에 수자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야구 모자를 팔거나, 군중 규모가 얼마나 큰가에 대해 떠들 때가 아니다. 그보다는 옆에 있는 이웃을 도울 때다”라고 말하면서 2012년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을 강타했을 때의 오바마 사진을 비교해서 올렸다. 사진 속에서 수재민들을 포옹하면서 위로하고 있는 오바마의 모습은 분명 트럼프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손 잡고.”
그런가 하면 수자는 트럼프 부부의 냉랭한 모습이 감지될 때마다 오바마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올리면서 이를 조롱하기도 했다. 가령 2017년 5월, 트럼프와 함께 텔아비브에 도착했던 멜라니아가 트럼프의 손을 툭 치면서 뿌리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을 때나, 로마에 도착해서는 머리를 쓸어넘기는 척하면서 묘하게 트럼프의 손을 피하는 모습이 목격됐을 때가 그랬다. 때를 놓칠세라 수자는 인스타그램에 ‘손 잡고’라는 제목과 함께 오바마 부부가 공식석상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앉아있는 사진을 올렸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사진을 하루에도 여러 장씩 업로드하고 있는 수자의 이런 활동에 대해 CNN은 “조용하게 SNS로 비판하고 있는 영상 시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예리한 풍자 덕분에 수자는 현재 누리꾼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길거리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수자의 이런 SNS 활동이 경솔하고 예리하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자는 “거친 악플을 올리거나, 혹은 살해 협박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혹시 트럼프 사진사로 일할 생각은 없었냐는 ‘포쿠스’의 질문에 수자는 “없었다. 나는 트럼프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경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또한 “나는 저널리스트다. 사진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분명한 것은 사진이 정치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오바마는 시각적 기록의 역사적인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트럼프의 전속 사진사는 셰일라 크레이그헤드다. 여성 사진사인 그녀는 이상하게도 트럼프의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은 카메라에 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그나마 친밀한 사진이라고 하면 트럼프가 손주인 아라벨라의 손을 잡고 굳은 얼굴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걷는 사진이 전부였다. 이에 대해 수자는 “크레이그헤드가 트럼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건지, 아니면 트럼프가 다정한 상황을 만들지 않고 있는 건지, 그건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바마 정부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수자는 “오바마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완벽한 대통령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때보다 두 걸음은 더 뒤로 후퇴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피트 수자는? 레이건과 오바마 전속 사진사로 활약 피트 수자는 레이건의 전속 사진사로 발탁되면서 백악관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 캔자스의 ‘채누트 트리뷴’지에서 사진사로 일했던 수자는 1983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로 발탁되면서 처음 백악관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5년 반가량 백악관에서 일했던 수자는 “개인적으로 레이건의 정책을 모두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레이건을 대통령으로서는 존경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레이건이 정부를 존중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며 레이건 정부 시절을 회상했다. 1998~2007년까지는 ‘시카고트리뷴’ 소속 사진기자로 일했으며, 지난 2005년 오바마가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 오바마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2009년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연임할 때까지 총 8년 동안 오바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전속 사진사로 일했다. 수자가 8년 동안 촬영한 사진은 190만 장가량이었다. 오바마의 공식 및 비공식 일정을 모두 전담해서 촬영했으며, 여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자가 에어포스원을 타고 오바마를 동행한 거리만 2400km에 달했으며, 방문한 지역은 미 50개주, 세계 60개국이었다. 그렇다면 연봉은 어떻게 될까.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지난 2015년 백악관이 발표한 직원 급여 목록에 따르면, 백악관 수석 참모진들의 연봉은 최고 17만 2000달러(약 2억 원)였다. [주] |
오바마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인 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수자는 이 사진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들이 집요하게 질문공세를 한다고 해서 출입을 막은 적이 없다” “그는 한 번도 언론을 ‘국가의 적’으로 여긴 적이 없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 개인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부었던 CNN의 케이틀린 콜린스 기자를 ‘부적절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의 공개 기자회견장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한 데 대한 비난이었다.
2013년 미셸의 생일에 촬영한 오바마 대통령 부부의 다정한 사진. 생일이 되면 오바마 대통령은 아내를 위해 직접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선물도 건넸다. 이 사진은 트럼프가 ‘폭스뉴스’에 출연해서 “너무 바빠서 멜라니아의 48번째 생일 선물을 살 시간도 없다”고 말한 것을 비웃는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