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특히 민 의원의 복귀는 당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당은 최고위원회 회의를 열고 ‘민병두 의원 사퇴 철회 요구’를 의결하기도 했다. 민 의원은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가 54일 만에 이를 번복하고 복귀했다. 미투 운동 이후 변화를 기대했던 여성 보좌진들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여성 보좌진은 “본인이 버티려고 해도 당에서 징계를 해야 할 마당에 본인은 사퇴하겠다는데 당에서 복귀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민주당에는 여성운동을 했던 여성 의원님들도 있는데 전부 침묵했다. 앞으로 누가 용기 있게 미투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민 의원 측 관계자는 “민 의원이 당시 일이 잘 기억 안 난다고 한다. 민 의원이 도덕적 결벽증이 있어서 일단 그런 의혹이 있으니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거다. 제기됐던 의혹을 인정해서 사퇴 선언을 했던 것이 아니다. 민 의원 사건은 일반적인 미투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는 했느냐고 묻자 “그 쪽 연락처도 모른다”고 답했다.
전여옥 전 의원은 안희정 사건이 터진 후 “여의도에는 수많은 안희정이 있다”면서 “‘안 전 지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그를 뛰어넘는 프로페셔널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미투 열풍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국회 내 미투는 단 한 건에 그쳤다.
한 여성 보좌진은 “국회는 매우 작은 조직이다. 한번 내부고발자로 찍히면 다른 의원실에 재취업도 불가능한 구조다. 해고는 매우 쉽다. 의원이 자르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자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일을 당해도 누가 용기 있게 말할 수 있겠나. 몇 년만 더 근무하면 공무원 연금이 나오니까 그때까지는 더러워도 참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성추문이 만연한 이유는 고용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충남도청 측은 안 전 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한 김지은 씨를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안 전 지사가 사직하면서 김 씨도 자동면직 처리를 당하고 말았다. 정치권 정무직들이 얼마나 취약한 고용형태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유승희 위원장은 안희정 사건이 불거진 후 국회 내 성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했는데 무려 1097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됐다.
유 위원장이 지난 5월 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희롱 338명, 가벼운 성추행 291명, 심한 성추행 146명, 스토킹 110명, 음란전화나 음란문자, 음란메일 106명, 강간미수 52명, 강간 및 유사강간 50명 등의 피해사례가 있었다. 이 중 심한 성추행이나 강간미수, 강간 및 유사강간은 중형이 예상되는 심각한 범죄다. 유 위원장 측은 피해사례를 수집만 했을 뿐 후속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유 위원장 측 관계자는 왜 가해자를 찾아내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피해사례가 접수됐지만 모든 조사가 익명으로 진행돼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조차 특정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신분을 밝히고 피해사실을 접수하라고 하면 아무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유 위원장은 설문조사를 토대로 토론회를 한 차례 개최하고 6건의 미투 관련 개정안을 발의했다.
미투 운동 이후 국회 내 여성들은 더 움츠러들었다. 미투 관련 인터뷰를 요청하자 상당수 여성 보좌진들은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한 여성 보좌진 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 인사도 “여성 보좌진 모임 회장이기 이전에 저도 한 의원실의 보좌진일 뿐”이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한 여성 보좌진은 미투 운동 이후 달라진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동안 서로서로 조심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회식도 크게 줄었다. 그런 점은 달라졌다”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일부 의원실에서는 앞으로 여성 보좌진을 뽑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펜스룰(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인터뷰에서 “아내 외의 여자와는 절대로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된 용어)만 더 강해졌다는 하소연이다.
국회는 보좌진 채용에 있어서도 성차별이 만연한 조직이었다. 일요신문이 정보공개요청을 통해 전달받은 자료에 따르면 하위직급인 9급(남성 109명, 여성 183명)과 8급(남성 124명, 여성 165명)은 여성이 더 많았지만, 고위직급인 4급(남성 537명 여성 40명)과 5급(남성 470명, 여성 111명)은 남성이 더 많았다(2018년 8월 8일 기준). 하위직급에는 여성이 많지만 고위직급으로 갈수록 남성 비율이 높아지는 완벽한 역피라미드 구조였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여자 직원은 결혼하고 출산하면 스스로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고위 직급으로 갈수록 남성이 많아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 성차별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여성 보좌진은 “국회에서는 하위직급은 커피 타고 손님 응대해야 하니까 여성을 많이 뽑고 고위직급은 주로 남성을 뽑는다. 여성들은 출산 후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가 없다. 역피라미드 구조가 생기는 것은 성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투 운동 이후 국회에는 관련 법안이 130건가량 쏟아져 나왔지만 아직까지 단 한 건도 처리되지 않았다. 국회는 국회 내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국회인권센터를 설립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보류 중이다.
미투 이후 새로 시행 중인 성범죄 예방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회사무처 측은 “기존 고충상담관 2명 외에 성폭력 전문 상담관 1명을 새로 채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새롭게 시행 중인 제도는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 여성 보좌진은 “상담관이 1명 새로 채용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겠느냐. 상담을 하고 싶으면 외부기관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산 낭비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자 최근 일부 국회 여성 직원들은 ‘국회페미’라는 단체를 만들어 스스로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국회페미는 회원 모집 글에서 국회를 ‘여성 혐오와 차별의 전당’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급에서 당연히 제외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잔심부름꾼 역할만을 강요하는 국회가 과연 민주주의의 전당이냐”면서 “국회가 감히 인권과 평등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 불평등, 차별, 권위주의, 반민주주의 구덩이에서 우리가 받아온 고통을 더는 참지 말자”고 참여를 독려했다. 단체를 만들게 된 계기 등을 물어보려 했지만 국회페미 측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당분간은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했다”며 거절했다.
앞서의 한 여성보좌진은 “미투 운동 당시 근본적인 개선책은 마련되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 아닌지 우려했는데 결국 우려했던 대로 됐다. 이제는 별 기대도 없다”고 말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