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대문독립공원의 독립관에서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 이태룡 소장을 만나 독립운동시기의 의병활동과 최근 서훈된 48분의 의병 중 44분의 의병을 발굴하게 된 계기와 과정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 소장이 순국선열 위패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큰일 하셨다. 처음엔 인터뷰를 완곡히 거절하셨는데.
“이번에 수훈을 받은 분들은 제가 발굴했지만, 신청은 순국선열유족회 명의로 했다. 김시명 유족회장께서 많이 도와주셨다. 내가 무슨 ‘영웅’처럼 묘사되는 게 싫었다. 그런 점이 개인적으로 좀 염려됐다. 그래도 ‘의병’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늘 경남 김해에서 올라왔다.”
―언제부터 의병 연구를 했나. 독립운동사에서도 의병 연구는 주류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86년에 석사를 준비할 때부터 했으니, 32년째다. 박사 논문이 ‘의병가사’였다. 내가 국내에서 의병가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1호다. 그 이전엔 이런 주제로 연구한 사람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학위도 삼수를 해서 6년 만에 받을 수 있었다.”
―원래 교직에 계셨다. 왜 하필 연구 주제로 의병을 택했나.
“아버지의 권유가 컸다. 집안에 큰아버지(5촌 당숙)께서 열여덟에 의병을 나가셨다 열아홉에 순국하셨다. 결혼하고 5일 만에 의병을 나가셨다고 한다. 큰할아버지가 당시 진주 부주사였는데 아들이 잡혀온 걸 눈앞에서 봤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기록이 제대로 없어서, 사촌형님이 헛된 죽음이 됐다’며 의병 연구를 권하셨다.”
―의병 연구 자체가 제대로 선행되지 않았던 만큼, 사료 발굴 과정도 힘들었겠다.
“1980~90년대 전국을 많이 다녔다. 호남, 영남, 강원은 물론 강화도, 진도, 완도 등 섬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공훈록을 뒤지면 언급된 의병의 출신지가 나온다. 그럼 군청으로 찾아가 그 의병의 후손이 사는 곳으로 간다. 그땐 차도 없어서 직행버스 타고, 택시도 대절해서 다녔다. 다행히 그 비용은 주간지 연재를 해서 충당했다. 전화도 없는 집이 많았다. 가보면 각 가문의 후손들이 자료를 남겨 놨거나, 내용을 얘기해줬다. 그 과정에서 인물을 발굴하기도 하고, 또 싸움터와 역사적 사실이 담긴 의병가사 등 작품을 발견하기도 했다. 교사였기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보충수업을 빼고 방학마다 전국을 누볐다. 때론 일본으로 건너가 사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면.
“사료를 정리하고 연구하다 보니, 기존에 알려졌던 사실이 과장되거나 엉터리도 많았다. 한 예로 최익현 선생은 이전까지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연구해보니 병사한 것(실제 현재 학계에선 ‘아사’가 아닌 ‘병사’가 유력)으로 확인된다. 대마도에서 100일 넘게 밥도 안 먹고 살았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이와 관련해서 학술회의도 했는데 그 후손들의 항의가 많았다. 그런 경우가 좀 있었다.”
―10년 전에도 이미 한 차례 서훈 신청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08년에 828명의 의병을 서훈 신청했다. 약 6년간 조사한 것을 5개월 정리 과정을 거쳐 신청했다. 그 분량이 4000페이지, 책 15권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50년 동안 전체 의병 수훈자가 1400여 명밖에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중 400여 명 서훈이 이뤄졌다.“
현재 수훈을 받은 의병이 2636명이기 때문에, 이 박사에 의해 수훈을 받은 의병만 전체의 약 5분의 1에 해당한다.
―고마워하는 후손들도 많겠다.
“사실 서훈 신청하기 전에 후손을 잘 만나지 않는다. 이전에 후손들에게 접근해 발굴 및 서훈 신청을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브로커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은 최은동 의병장의 후손이 기억난다. 지난해 여든이 넘은 최 의병장의 손자가 내게 찾아왔다. 국회에서 학술발표를 하고 있던 자리였는데,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이셨다. 이전에도 최 의병장은 여섯 차례나 서훈 신청을 했는데 계속 탈락됐던 터였다. 그래도 그 손자 분은 내게 감사하다고 연락도 하셨는데, 지난 설에 연락이 안 오더라. 얼마 후 그 아드님이 ‘증조부가 서훈을 받게 됐다’고 감사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그 손자 분은 지난 1월에 돌아가셨다. 결국 그분은 본인 조부의 서훈 결정을 못 듣고 돌아가신 거다. 내가 그 전화를 받고 얼마나 운 줄 모른다.”
―브로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것 때문에 억울한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동명이인의 경우다. 브로커와 가짜 유족끼리 짜서 자신들의 선친과 이름이 같은 의병장의 이름으로 서훈을 신청해 받는 경우다. 진짜 후손들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화병이 난 사례도 있다. 이런 경우 수정해야 하고 서훈에 따른 돈도 다 돌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보훈처 입장에서 골치 아프고 또 공무원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
―5년 전,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학교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임기 3년 반을 남긴 시점이었다. 교장이 되니 할 일이 너무 많고 글 쓸 시간조차 없더라. 또 그동안 연구한 것을 더 늦기 전에 책으로 내야 했다. 광복 70주년 전엔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야마구치의 데라우치 문고를 보니, 너무 부끄럽더라. 우리 사료가 그거에 비해 너무 빈약했다. 집사람이 좀 섭섭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퇴직 후에도 연구에 매진하느라 가족들도 좀 섭섭해 하겠다.
“가족과 보낼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집사람이 나의 연구를 이해해 준다. 얼마 전 집 근처에 연구를 위해 오피스텔을 얻고자 했는데 집사람이 별도의 서재가 딸린 큰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 준비 중이다. 집사람한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웃음).”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