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구두 명장 1호’ 유홍식 명장. 사진=이종현 기자
—13세에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구두를 처음 배웠다고 들었다.
“6학년 2학기에 아버지 돈을 훔쳐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서 구두일을 배웠다. 만들기나 손장난을 좋아해서 적성에도 잘 맞았다. 서울로 도망간 지 1년 만에 명절이 돌아와서 집에 갔다. 1년 만에 사라진 아들이 돌아오니 집에서 난리가 났다. 아버지는 다시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구두일을 끝까지 하겠다고 했다. 결국 아버지가 1주일 만에 ‘서울서 잘 배워가지고 오면 가게 차려주마’라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마음 놓고 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결과 2013년에 ‘서울시 수제화 명장 1호’로 뽑혔다.
“원래는 다시 고향인 광주로 내려가 구두를 만들려고 했다. 광주에 집까지 계약하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구청에서 수제화 명장 선정 대회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다. 결국 내가 명장 1호로 뽑혔다. 그런데 성동구에서 성동역 1층 하부 교각에 마련된 박스숍에서 바로 영업을 시작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광주 집을 다시 팔고 서울에서 정착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두를 만들어 화제가 됐다.
“작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일주일이 지나 웬 여자가 찾아왔다. 나보고 출장을 가자고 하기에 ‘난 출장 안 다닌다’고 말했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다 ‘청와대에서 나왔습니다’ 하더라. 그래서 청와대로 가 문 대통령 발 치수를 재고 구두 여섯 켤레를 만들었다. 이후 설에 한복 입으면서 신을 전통신발 형식의 구두 하나를 더 만들어드렸다. 문 대통령은 굉장히 소탈했다. 양말도 내 것보다 더 싼 시장에서 산 것을 신고 있었다.”
유홍식 명장은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수제화를 만들어 관심을 모았다. 사진=이종현 기자
—문 대통령 구두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나.
“꽤 많았다. 문 대통령과 똑같은 신발 만들어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별한 신발은 아니다. 대통령은 복잡한 신발을 신으면 안 되니까.”
—구두 디자인도 직접 하나.
“구두 처음 만들 때부터 직접 디자인을 했다. 디자인을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냥 눈 감고 상상하다 떠오르면 만들고 그랬다. 평생을 구두만 보고 살았는데,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만든다. 실제 어떤 신발은 시골에서 짚신을 보고 착안해 만들었다. 여섯 번 실패 끝에 상품이 됐는데 너무 좋아서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 아직도 재밌고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수제화 만드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고 하던데.
“기존 구두장이들의 막내가 55세다. 밑으로는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수제화 시장 상황이 어렵다는 거다. 그런데 최근 젊은이들 몇 명이 뛰어 들었다. 내 수제자가 세 명 있는데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이다. 두 명은 지금 이탈리아에 있고, 한 명은 국내에서 활동하는데 조만간 나와 합류할거다.”
—최근에는 서울동부지법에 피켓시위를 다녀온 걸로 안다.
“‘제화공들의 퇴직금 청구소송 중지와 도급제 인정을 촉구하는 시위’였다. 구두업계는 100년 전부터 제화공들에게 와리제(인센티브제)로 돈을 줬다. 그래서 따로 퇴직금 제도가 없다. 그런데 최근 몇몇 제화공들이 퇴직금을 달라며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구두업주가 돈벌이가 되는 직업이 아니다. 월 4000켤레를 생산해도 겨우 300만 원 수익을 가져간다. 그런 상황에서 수천만 원씩 퇴직금을 달라는 말은 공장 문 닫으라는 말이다. 벌써 퇴직금 문제로 공장 운영하기 어려워 자살한 운영자도 2명 있다. 결국 한국 제화산업 전체를 자멸의 길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퇴직금을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는 와리제였으니 감안하고, 이제부터 퇴직금 제도를 준비해서 줄 수 있는 여력을 갖추는 기간을 갖자는 것이다.”
—최근 소공인들은 비롯해 소상공인들이 어렵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온다. 직접 겪은 체감은 어떠한가.
“4년 전에 처음 여기서 문을 열었을 때는 장사가 제법 잘됐다. 그런데 갈수록 장사가 안 된다. 굉장히 힘들다. 그래도 나는 유명세 때문에 밥이라도 먹고 사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정말 힘들다. 앞으로도 문제다. 대기업 메이커들은 피 빨아먹듯 물건값을 계속 깎아대고 있다. 결국 구두공장은 다 없어지고, 우리 같은 공방 형식만 살아남을 것 같다. 그럼 한국 국민들은 질 나쁜 구두를 신게 된다.”
—이에 정부에서도 소상공인들을 위해 여러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56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는 유홍식 명장의 손. 유 명장의 왼손 새끼손가락은 한 마디가 없다. 유 명장은 “예전에 구두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들어가 잘렸다. 40년도 넘었다”고 밝혔다. 사진=이종현 기자
“정부에서 정책을 이것저것 내놓고 있는데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식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나라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렸는데, 경기가 어떻게 1년 만에 살아날 수 있겠느냐. 지금 문재인 정부 때문에 경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몰상식한 거다. 다 거덜 난 집구석에 대장 새로 바뀌었다고 다시 창고가 채워지겠나.”
—얼마 전에는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찾아와 면담했다.
“수제화 판로개척 관련해 얘기를 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공영홈쇼핑에서 수제화를 판매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내가 ‘그건 대량생산하는 기업들이나 가능하다. 나는 많이 만들어야 하루에 3~4개 만드는데 어떻게 수요를 감당하겠느냐. 또한 홈쇼핑에서 60~70만 원하는 신발을 누가 사겠냐’고 사정을 설명했다. 이후 추가로 나온 대책은 없었다.”
—그렇다면 소공인들에게 필요한 지원이나 대책은 뭐가 있을까.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펼쳐야지 보여주기식 정책을 해서는 안 된다. 서울시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50여억 원을 들였다. 하지만 세금낭비라고 본다. 차라리 그 50억 원을 써버리지 말고, 5억 원짜리 가게 10개를 얻어서 40여 곳의 영업을 도와주면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지 않겠나. 또한 건물 계약을 하면 원금 50억 원은 남는 것 아닌가.”
—50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는데, 은퇴 계획은 있나.
“아직 은퇴계획은 안 정했다. 내 나이가 칠십이지만 아직도 40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 술 담배를 평생 안 했으니까. 56년 동안 구두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재밌다. 색다른 구두가 나왔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직업에 대해 상당한 긍지도 있다. 오는 10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연다. 구두장이 후배들에게 구두 만드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오라는 의미도 있다. 개인전이 끝나면 내 인생이 한 단계 더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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